콘도 요시후미 <귀를 기울이면(1995)> 리뷰
0. 어린 시절,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세계를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세계 밖으로 나오게 되고, 자신이 이 넓은 세상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시기, 우리는 자신만의 꿈을 꾼다. 그 꿈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듯, 모든 것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그 순간은 아름답다. <귀를 기울이면>은 이러한 아름다운 시기를 중학생 ‘시즈쿠(혼나 요코 분)’의 이야기를 통해 따뜻하게 그려낸 좋은 작품이다.
* 아래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귀를 기울이면>은 성장담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 각자의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작품의 주인공인 ‘시즈쿠’도 마찬가지이다. 소설을 좋아하여 많이 읽고, 친구 ‘유코(요시야마 마이코 분)’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일반적인 중학생. ‘시즈쿠’에게 사랑은 남일이다. ‘유코’가 자신이 ‘시즈쿠’의 친구인 ‘스기무라(나카지마 요시미 분)’을 짝사랑한다고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세상은 갑자기 흔들린다. 단순히 친구라고 생각하였던 ‘스기무라’가 사실은 자신을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동시에 도서실에서 대여하는 책의 도서 카드에 매번 쓰여있는 ‘세이지(타카하시 잇세이 분)’라는 존재에게 정체 모를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즈쿠’는 자신의 세상 속에서 나와, 모두의 세상 속 구성원이 된다.
2. 이 세상 속에는 자기 자신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좋아한다’에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 ‘시즈쿠’의 눈앞에 나타난 ‘세이지’의 존재는 이러한 사실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바이올린 제작사라는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세이지’는, 항상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던 ‘시즈쿠’에게 큰 자극을 준다. ‘시즈쿠’는 ‘세이지’를 보며,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깨닫는 동시에 그가 자신과 다른 속도로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조급해진다.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자신보다 빠른 속도로 자신을 떠날까 봐, ‘세이지’뿐 아니라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그렇게 자신보다 앞서나갈까 봐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이제 ‘좋아한다’가 아닌, ‘잘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3. ‘잘해야 한다’는 ‘좋아한다’와 다르게 고통을 동반한다. ‘시즈쿠’ 역시 ‘잘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그 이상의 고통을 겪는다. 가장 큰 고통은 과정이 아닌 결과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였음에도, 자신의 부족함만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즈쿠'에게 그의 첫 소설을 읽은 ‘니시 지로(코바야시 케이쥬 분)’ 할아버지는 ‘세이지’의 첫 도전을 보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시즈쿠’에게 무엇보다 큰 위로다. 자신의 꿈을 위해 이탈리아로 떠난 ‘세이지’를 보며, ‘시즈쿠’는 뒤쳐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즈쿠’는 이렇게 첫사랑을 겪고, 그가 자신보다 앞서나갈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고, 동시에 그 역시 자신처럼 고민하며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렇게 ‘시즈쿠’는 사랑을 통해 자신만의 세상 밖으로 나와 모두의 세상 속 구성원으로 성장한다.
4. 이러한 성장담은 굉장히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모두가 지나왔던 ‘꿈을 꾸는 시기’의 아름다움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 시기가 어떠한 결말을 맞이했든, 그 시기가 아름다웠음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영화는 ‘시즈쿠’와 ‘세이지’가 결국 꿈을 이루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보내고 있는 아름다운 시기를 보여줄 뿐이다. 이러한 시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처음’에서 오는 미숙한 진심이다. ‘시즈쿠’도, ‘세이지’도 미숙하다. 처음으로 만난 꿈에게도, 처음으로 만난 사랑에게도 모두 미숙하다. ‘시즈쿠’가 작중 작사한 ‘콘크리트 로드’의 가사는 이러한 미숙한 진심을 잘 보여주는 가사인데, 당대를 살아왔던 이들이 미숙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콘크리트 로드’를 활용해 순수하게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빚어진 미숙한 진심은 작품에서 풍겨지는 특유의 몽글몽글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5. ‘니시 지로’ 할아버지를 비롯한 주변인들은 이들의 미숙한 진심을 서포트하는 역할을 한다. 작품의 주요 소재이기도 한 ‘문 남작’은 이를 잘 보여주는 소재인데, 이는 그들을 도와주던 ‘니시 지로’ 할아버지의 과거 이루지 못 한 꿈과 사랑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작품 중반부에 나오는 합주 장면은 무척이나 낭만적인 장면이다. ‘시즈쿠’와 ‘세이지’의 미숙한 진심을 서로에게 표현하는 장면이자, 그러한 시기를 보냈던 노인들이 자신들의 순수하고 미숙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동시에 아이들의 미숙한 진심을 응원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장면은 같은 시기를 보냈던 관객들도 자신들의 아름다웠던 시절을 되돌아볼 수 있게 만든다.
6. 본 작품은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모두의 세계로 나아갈 때의 미숙하지만 아름다운 마음을 그려낸 따뜻한 성장담이다. ‘처음’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따뜻한 미숙함을 아름답게 풀어냈고, 동시에 이를 보는 주변인들과 관객들로 하여금 꿈꾸던 아름다운 시절을 떠올리며 주인공들을 응원하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귀를 기울이면>은 순수했던 시절이 끝난 어른들에게도 순수한 마음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포근하게 일깨워주는 따뜻한 명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