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준 <왕과 사는 남자(2026)> 리뷰
0. 계유정난 이후 왕위에서 내쫓긴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된 후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시간은 대한민국 대부분의 국민이 아는 대표적인 조선사의 비극이다. <왕과 사는 남자>는 역사에 쓰여진 이 필연적으로 비극적인 서사의 흐름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역사와 기억이라는 희망을 얹어 관객에게 전달하여 같이 추모하고자 하는 작품이다.
* 아래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 이홍위(박지훈 분)’의 성장담이다. 극 초반부, ‘이홍위’는 자신을 복위하려다 실패하고 국문을 받는 신하들의 비명을 듣고 공포와 죄책감에 식사도 하지 못하고, ‘계유정난’의 주동자이자 실권자인 도승지 ‘한명회(유지태 분)’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여리고 겁 많은 소년이다. 동강을 건너 가야만 하는 오지 청령포로 유배된 직후에도, 자신으로 인해 죽어간 충신들에 대한 죄책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악몽을 꾸고 죽음을 택하려고 할 정도이다. 하나, 활로 호랑이에 맞서 광천골 사람들을 구한 이후 그는 변하기 시작한다. 폐위된 왕을 위해 전국에서 온 이들이 보내준 선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고, 보수주인인 ‘엄흥도(유해진 분)’의 아들 ‘엄태산(김민 분)’의 글을 가르쳐 마을 아이들이 글자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고 마음이 조금씩 단단해지게 된다. 이후 ‘엄태산’이 ‘한명회’의 계략으로 관하여 끌려가 매질을 당할 때, 초반부의 모습과 다르게 ‘한명회’와 맞서는 모습은 그가 호랑이를 잡는 진정한 왕으로 성장하였음을 보여주며, 과거와 다르게 자신의 소중한 이들을 더 이상 잃지 않고자 숙부 ‘금성대군(이준혁 분)’의 거사에 참여하고자 결정하고 동강을 건넌다.
2. 모두가 아는 역사적 사실 그대로, 이 성장담의 끝은 비극이다. ‘이홍위’는 그의 옆에 서기로 마음 먹은 ‘엄흥도’와 함께 간신히 ‘금성대군’의 세력과 접촉하지만, 무수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한명회’에게 잡힌다. 거사의 본진인 ‘금성대군’ 쪽도 마찬가지로,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붙잡힌다. 결국 그들의 처절한 노력들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발버둥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 청령포 근처에서 ‘이홍위’의 답신을 기다리던 밀사가 사로잡힌 이후부터 그들은 ‘한명회’ 손바닥 안에 있었다는 것을 작품은 넌지시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처절한 발버둥에 성공의 희망이 전혀 없다고 하여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영화는 이러한 처절함을 관객에게 전달함으로서 결과보다 중요한 신념이 있다는 것과, 이를 역사가 기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한다.
3. 그런 의미에서, <왕과 사는 남자>의 결말은 필연적인 비극 속에서 나름의 희망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역사적으로, ‘이홍위’의 삶은 세조에 의한 일종의 살해로 끝난다. 작품은 이러한 비극에 ‘강을 건넌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홍위’는 강을 건너서 ‘청령포’라는 유배지로 왔으니, 다시금 강을 건너야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이홍위’를 ‘청령포’로 들일 때 노를 밀어 강을 건너도록 했던 ‘엄흥도’는 줄을 당겨 다시금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청령포에 감금된 이후부터 어떠한 처절한 발버둥으로도 죽음이라는 결말을 벗어날 가능성이 없던 비극적인 삶에서 해방된다는 의미를 그의 죽음에 부여한다. 작품은 조그마한 이러한 희망을 통해 ‘이홍위’의 필연적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희석하고, 동시에 추모하고 위로한다.
4. 이러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각본은 다소 기복이 느껴진다. 본 작품의 초반부는 억지스럽고 과장스러운, 부정적인 의미로서 한국 영화의 전형성을 강하게 띤다. 하지만 중반부부터는 관객을 흡입력있게 끌어당긴다. 비극적인 결말이 예정되어 있음을 모든 관객이 안다는 점을 이용하여 ‘이홍위’와 그를 따르는 충신들의 노력들을 더욱 처절하게 보이도록 하며, 그 모든 시도가 무위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5. <왕과 사는 남자>는 계유정난 이후 ‘단종 이홍위’가 겪은 비극을 스크린으로 인상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역사서에 쓰여 있는 ‘이홍위’란 인물은 각종 미디어에서 불쌍한 희생양으로만 그려진다. 하나, 본 작품은 이러한 단종이 비단 역사의 희생양으로 존재하는 것만이 아닌, 희로애락을 모두 느꼈던 살아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전달한다. 이렇게 단종이라는 인물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새롭게 남겼다는 점만으로도 <왕과 사는 남자>는 의미 있는 작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