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색, 계>
이미 너무나 유명한 영화들을 아직 관람하지 않았을 때, 그 영화들은 나에게 '숙제'와도 같은 존재가 된다. 이안 감독의 <색, 계>도 그들 중 하나였다. 들리는 말들-야한 장면이 있지만, 야한 영화로 소비되기엔 아깝다-을 생각하면 홍콩영화 글쓰기 모임 때문에라도 꼭 봐야 했다. 마침 <헤어질 결심>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탕웨이의 다른 작품도 보고 싶었고, 평일 오후 7시, 퇴근하고 바로 넷플릭스를 켰다.
3시간 조금 안 되는 러닝타임이었지만 몰입하기에 충분한 연출이었다. 1942년 상하이가 배경인 데다 일본군에 붙어 매국노 짓을 하는 남자를 암살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자의 스토리였다. 국가는 다르지만, 우리나라 친일파 역사와 굉장히 비슷한 모습을 띄고 있었기에 아마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공감하며 봤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스토리를 설명하자면, 자즈(탕웨이)라는 여대생은 전쟁으로 인해 홍콩으로 오게 되고, 여기서 항일 운동하는 극단에 들어간다. 멋진 연기로 인정받은 자즈는 선배 광위민의 권유로 매국노 이모청을 죽이자는 계획에 동참한다. 막 부인으로 위장, 열심히 암살하려던 자즈와 친구들의 계획은 이모청이 상해로 이사감에 따라 물거품이 되고, 시간이 흘러 광위민의 권유로 다시 암살 계획을 세운다.
그렇게 다시 만난 둘은 이모청이 강제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시작되고, 이후 계속해서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이모청에게 빠져가는 자즈는 스스로 위험하다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둘의 사랑은 깊어져가고, 한편으로 자즈의 암살 계획도 이행될 타이밍만 바라보고 있는데, 이모청이 자즈에게 특별히 맞춰준 반지 가게에서 자즈는 이모청을 향해 "도망가요"라고 한다. 죽이기 위해 잠입하고, 밥도 먹고, 양복도 맞추며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다이아몬드 반지에는 관심 없고, 그 반지를 낀 자즈의 손을 보고 싶다" 말하는 이모청의 모습에 자즈는 암살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자즈는 친구들과 함께 숙청당하고, 이모청이 자즈의 침대에서 그리워하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자즈가 왜 이모청에게 반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색, 계>에서 양조위의 모습은 너무나도 '신사스럽'다.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부인과 친구들을 대하며, 딱 지켜야 하는 선까지만 침입하는 느낌이다. 물론 처음 관계를 맺을 때는 굉장히 폭력적이었지만, 이후 두 번의 베드신에서는 서로의 육체를 강하게 느끼며 폭력적인 모습보다는 서로에게 강렬하게 빠져드는 모습이 보인다. 이후 일본 창녀촌에서 노래를 부르는 자즈의 모습에 눈물을 닦는 이모청의 모습도 사랑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봤다.
꽤나 눈살 찌푸려지는 장면들 때문에 '야한 영화로 소비되기에는 아깝다'는 평이 많은데, 그러한 이유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영화였다. 암살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 결국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그 사랑의 계기를 느낄 수 있었던 순간까지. 굉장히 관능적이면서도 사랑의 순간이 공감 갔던 영화였다. 반지 가게에서 도망치라고 말하는 탕웨이의 연기와 그 눈빛을 바라보는 양조위의 흔들리는 눈빛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한편으론 이런 궁금증도 생긴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설령 그 사람이 내가 죽여야 하는 사람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