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 자격

쉽게 공정해지는 법

by 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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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타면 늘 묘한 감정이 찾아온다. 하늘이라는 동일한 경로를 지나가면서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경험을 한다. 비좁은 좌석에 몸을 구겨 넣고 이동을 견디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단 몇 걸음 뒤에서는 온전히 누울 수 있는 공간에서 셰프의 코스 식사가 자연스럽게 제공된다. 한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이 대비는,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질문을 조용히 남겼다.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이
어디까지 달라져도 괜찮은 걸까.


뒤에서는 '견뎌야 하는 이동'을 대가로 더 좁고 많은 인원을 싣고,

앞에서는 '호화로운 대접'과 더 넓은 공간을 비용으로 구매하는.


이 격차는 기업 효율을 위한 운영 방식이라며 당연한 것으로 스스로 납득해 왔다.

자연스럽게 이 구조에 의문도, 불편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터 이 불평등이 모두에게 자연스러운 질서가 되었을까라는 의문이 차오르기 시작한 순간, 비행기부터 시작된 도시와 사회 전체의 풍경이 무섭도록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누군가의 '불편'이 전제된 세계에 익숙해진 나를 발견했을 때, 이상한 거북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 풍경은 비행기에만 머물지 않았다. 병원에서, 학교에서, 아파트 단지에서—우리가 살아가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비슷한 간극이 반복된다. 같은 진료를 받으러 왔음에도 누군가는 대기실에서 몇 시간을 보내야 하지만, 누군가는 예약된 별도의 공간으로 곧바로 안내받는다. 같은 교실에 앉아 있더라도 출발선의 넓이는 처음부터 다르고, 방과 후 선택지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손의 개수까지 달라서 어떤 학생은 이미 쌓여 있는 환경을 딛고 다음 단계를 자연스럽게 밟아가지만, 어떤 학생은 학원도 문제집도 고를 여유가 없는 곳에서 때로는 스스로 학원비를 마련해 가며 모든 것을 자기 몫으로 버텨야 한다.


그렇게 각자의 여건을 뚫고 기적처럼 같은 곳에 도착했더라도, 그 성취가 동일하게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결과를 앞에 두고도 사람들은 출발선의 차이를 들춰내고, 경험한 교육 환경의 수준을 근거로 다시 서열을 매긴다. ‘공부는 노력한 만큼의 성과’라는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듯,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다.


어떤 노력은 훨씬 무거운 조건 위에서, 더 큰 손실을 감수하며 버텨야만 가능하다는 것.


우리는 스스로를 ‘공정하다’는 믿음의 중심에 머물게 하고, 그 과정에서 불편한 진실은 가려진다. 그 미세한 균열을 직면하는 순간부터, 우리가 노력이라 믿어왔던 성취가 사실은 누군가의 불편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자연스럽고도 무심하게 타인의 불편과 나의 편의를 연결하는 고리를 지워버린다. 나보다 더 많은 편의를 누리는 이들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내 편의 뒤에 숨은 타인의 불편을 손쉽게 정당화하며, 그렇게 내 세계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다.




똑같이 땅을 딛고 살아도, 누군가는 좀 더 높은 곳에서 출발한다.

그 차이는 단순한 편의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사회의 구조가 응축된 장면이며, 우리가 사는 세계의 불평등을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단면이기도 하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해 왔고, 물질적 풍요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확장되었지만, 그 풍요가 모두의 존엄을 확장시키는 데 쓰이고 있는가 묻게 된다.

세상은 바뀌어온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같은 격차를 반복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문제 제기를 과하다고 말한다. “시장 논리”를 언급하며, 서로 다른 노력과 선택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물론 노력은 존중받아야 하고 성취에는 합당한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존엄까지 차등 지급될 이유는 없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질서 속에, 누군가에게는 삶의 기본선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이 있다면
그것은 시장의 논리가 아니라 사회가 지키지 못한 윤리의 문제다.


나는 내 경험을 통과하며 이 모순을 뒤늦게 깨닫는다.
내가 불편을 느끼기 전까지는, 그 불편을 감당해 온 사람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내 자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비좁음 위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사회는 인간의 욕망으로 움직인다. 더 안전하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고, 더 좋은 조건을 누리고 싶다는 마음이 시장을 성장시킨다. 그러나 성장의 속도가 빠를수록, 그 속도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존엄은 더 빠르게 남루해진다.

국가는 효율과 형평 사이를 조정하려 하지만, 그 줄타기 속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이 늘 존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 평등은 모두를 똑같이 만드는 평탄화가 아니다.


그것은 단 하나의 원칙이다.


누구도 존엄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 최소한의 기준이 확보된다면, 각자의 성취와 차이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빛날 수 있다.


오늘날의 기술은 희소성의 벽을 조금씩 허물고 있다. 자동화가 육체를 대신하고, 알고리즘이 지식을 대신하며, 다른 누군가의 삶을 가능하게 했던 노동들이 점점 기계로 이전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술적 진보가 사회 전체의 ‘존엄’을 확장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윤리적 실패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물어야 한다.


기술이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시대에,
왜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가.


결국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를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동일한 하늘길을 나는 비행기 안에서도 좌석은 서로 다르다.
그 사실은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존엄의 좌석 또한 자연스럽게 나뉘고 있는 이 지점에서

이 무심한 납득에 단 한 번도 의심이 없었는지—묻고 싶다.





by so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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