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온기가 우리를 지키는 방식
언어는 애정이 수반될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의미에 가까워집니다. 말의 의미를 제3자가 적확하게 해석하는 일은 불가능의 영역이기에, 우리는 그 사람이 품은 의미에 아주 가깝게 닿기 위해 곁에 머물며 그의 언어를 오래 머금는 것, 그것을 우리의 언어로 애정이라 명명했습니다.
언어는 산화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나에게서 벗어나 공기 중에 흩어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의미는 조각나고 변질됩니다. 그때부터 그 말은 내뱉은 사람의 것이 아닌, 전달된 상대의 몫으로 온전히 이전됩니다.
이제 상대가 가진 애정의 크기가 해석의 정확도를 결정합니다. 정확도는 정답이 없어 수치화되지 못하지만, 돌아올 말이 상대에게 얼마나 깊이 스며드는가, 그 침투의 정도가 의미의 온도를 정합니다. 정답이 아닌 해답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더 깊이 닿을 수도 있다는 희망과, 영원히 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을 동시에 품은 날카로운 양면성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깊이 애써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단어의 배열, 문장 사이의 숨, 목소리의 울림, 마침표 뒤에 머무는 짧은 시선까지.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는 의사소통이라는 본질에 가닿지 못하고 자신에게서 언어를 머물게 하며 마음껏 오역합니다. 그것은 언어가 되지 못하고 청자, 화자라고 일컬을 수 없는 모두가 길을 잃어버린 공허한 시간으로 흩어져 버립니다. 상대에게 가닿지 못하는 언어를 뱉는 시간은 청자, 화자 모두가 비참해지는 애정 실패의 현장이 되고 그곳에는 온기를 잃은 차가운 헛숨만이 내 코끝에서만 머물다 흩어집니다.
요즘 우리가 만드는 언어들은 존재한다고도 안 한다고도 말할 수 없는 공간에 각자의 말들만 허공에 부유하는, 그 어느 때보다 외롭고 헛헛한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듣지 않으려 해도 보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내뱉는 기이한 소통으로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서 마음껏 오역하고 쉽게 칼을 겨눕니다. 그리고 누군지도 모를 어떤 이로 인해 순식간에 자신을 잃고 주저앉습니다.
언어의 본질은 애정이라는 것.
우리는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언어를 배워왔고 소통했으며, 그 과정에서 [사랑, 우정, 미움, 슬픔, 다정]과 같은 형체 없는 감정들에 이름을 주어 서로를 지탱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추상명사들의 의미가 흐려지고 우리는 [불안, 의심, 두려움, 위태로움]이 어떤 것인지를 더 쉽게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내가 하는 사랑과 당신이 하는 사랑은 달라지고 있고, 그 사이에 생긴 간극에 대해 상대와 눈 맞추려 하기를 두려워합니다. 저마다 쥔 손에 있는 각자의 세상에서 각자의 해석으로 다름을 틀림으로 순식간에 치부하고 등을 돌리기도 하면서요. 그 둘은 영원히 치유되지 못할 상처를 품은 채로 남습니다. 그렇게 남겨진 상처는 어디에도 이어지지 못한 말의 잔해입니다. 우리는 그 잔해를 밟으며 걷고, 또 다른 상처를 만듭니다. 돌아서서 상대의 상처를 보고 나에게도 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가 싫어서 우리는 그렇게 양방향이 아닌 일방향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애정이 빠져나간 언어는 말이 아니라 단절의 형태가 되어
우리는 서서히, 그러나 순식간에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희망을 거는 지점은, 우리가 멈추지 않고 서로를 향해 말을 건넨다는 사실입니다. 오역되더라도, 공중에서 흩어지더라도, 내 의미에 닿아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누구에게든 닿기를 바라며 애정을 담은 문장을 내보냅니다.
어느 이의 입술에서 떠난 다정한 한 문장이, 바다를 건너 지구 반대편의 낯선 이를 부드럽게 끌어안는 — 그 황홀하고 불가사의한 기적을 일상처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말에 온기를 실어 건네주었으면 하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 온기만으로 누군가는 하루를 버티고, 더 강하게는 각자의 삶을 지탱하는 뿌리로 자라나는 힘이 되기에도 충분하니까요.
언어는 언제나, 연약한 인간의 취약함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단단하게 단련해 온 방패였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사는 동안,
추상적이고 아름답게 말해보자면 영원하게,
말의 온도가 우리를 지키며 흐르기를 바랍니다.
by so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