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몸으로 아픔을 겪어야만 사람이 성숙해진다고는 믿지 않았다. 타인의 이야기와 스크린 속 서사, 휴대폰을 타고 흘러드는 상처의 잔광만으로도 고통의 윤곽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사랑 앞에서 무너지는 사람들, 예감된 실패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출발선으로 되돌아오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맨땅에서 뛰어올라 허공을 움켜쥐는 그들의 선택은 나에게는 무모함으로만 보였다.
나는 그들의 파편을 수집하며 내 파손을 계산했다. 누군가 먼저 넘어지는 모습을 본다면 그 자리를 피해 가는 것이 늦은 사람의 특권이라 여겼다. 예측 가능한 통증을 비켜갈 자유를 나는 행운처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타인의 ‘비켜간 자리’만 좇다 보니 내가 걸어온 길은 언제나 누군가의 자취가 먼저 남은 길이었다. 내 발자국은 늘 뒤늦게 찍혔다. 넘어지거나 맞닥뜨리거나, 어떤 선택 앞에서도 자기 걸음을 남긴 사람들에게는 눈부신 향이 났다. 내가 알고 있던 오감을 넘어서는 색과 온도와 분위기, 그들만의 생이 있었다.
타인의 격렬한 문장 속에서 나는 끝내 그들의 안전한 관객으로 남았다. 그 순간부터, 내가 스스로 제작한 비극이 내 안에서 조용히 시작되었다.
그 비극은 점차 형태를 갖췄다.
사랑의 언어를 잃고, 도전의 맥박이 희미해지고, 다정함조차 경계하게 되는 형태로.
사랑의 어조가 희미해졌고, 다정함을 의심하는 습관이 생겼으며, 가까이 서 있는 사람이 건넨 한 마디에도 이유 없이 무게를 재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투명해지는 인간이 되었다. 고독은 슬픔의 기회는 앗아갔지만 어딘가의 통증은 줄어들지 않았다. 슬픔의 기회와 동시에 기쁨의 가능성도 잠식해 갔다.
그 무렵 나는 남의 문장 속을 걸었다. 누군가의 사계와 회복의 흔적이 인쇄된 활자를 따라가며 그들의 시간 속에 몸을 숨겼다. 그들이 한 권의 책을 덮고 다음 장을 쓰기 시작할 때도, 나는 같은 문장을 반복해 읽는 사람처럼 제자리였다.
나의 계절은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다.
등장인물도, 전환도, 사계도 사라진 내 이야기는 비어 있는 페이지 위 허공에서 떨리고만 있었다. 지금 이 글조차 남의 이야기에서 남은 잔향을 더듬 듯 써나갈 뿐이었고,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모든 문장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아니면, 사랑하는 방법을 잊어버려서 문장들이 흐려진 걸까.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점점 어려워졌다. 일어날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더 어렵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사람의 발걸음이 제일 무겁듯이, 그저 머무르는 게 최선이 되는 순간이 있다. 미워할 힘조차 남지 않아 무너지는 순간이 담담해지는 건, 슬픔이 무력해지는 가장 잔혹한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동안 쌓인 정일까, 아니면 여전히 살아 있음에 대한 마지막 증명?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면, 다리를 주물러 일어설 힘을 찾았더라면,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잠시만 잡아달라 했더라면—그런 덧없는 후회들이 차고 들었지만 살기 위한 방어였음을 나는 아는데, 어떻게 그 몸부림을 원망할 수 있을까.
내면의 표면이 아주 느리게 갈라지는 것 같은 감각이 찾아왔다. 오래 닫혀 있던 마음이 미세하게 들썩이며, 무엇이 달라졌는지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스며들었다. 세상이 갑자기 나를 위로한 것도, 계절이 돌연 따뜻해진 것도 아니었다. 단지, 너무 오래 방패를 들고 있었던 지라 힘이 바닥나 버렸고, 그 순간 선선한 바람이 통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 바람을 통해 다른 계절의 향이 흘러 들어왔다.
이 모든 건 타인의 이야기를 더 사랑했다는 것에 대한 벌이었다.
놓쳐버린 내 삶을 누군가의 사건에 기대어 맡기려 한 대가였다.
멈춘 지점에서야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그 지연 속에서 비로소 각자의 아름다움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게 그 어리석음이 주는 미덕일까.
달릴 때에는 속도만 느껴진다.
멈추면 계절이 느껴진다.
계절이 느껴진다는 건 이대로 삶을 속도로만 채우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렸다. 우리는 삶에서 꼭 보고, 느끼고, 지나가야 하는 각자의 몫을 가진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고이지 않고 흘러가기 위해, 끊임없이 내 것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내 손으로 쓰인 문장들은 나를 흐르게 할 유일한 중력이었다.
내 문장은 여전히 끊긴다. 결말까지 가는 일은 아직 두렵다. 발단에 발을 올리는 순간, 전개와 위기와 절정과 결말이 한꺼번에 삶의 무게를 요구할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시작 앞에서 자주 멈춘다. 그 멈춤은 나약함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는 속도를 찾기 위한 망설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멈추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기껍게 속도를 낮춘다.
이미 써둔 문장들은 도망가지 않고 내 책 어딘가에 단단히 남아 있다. 사라지지 않는 문장이 있다는 건, 떠밀리고 헤매는 날에도 나를 붙잡아둘 최소한의 힘이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나는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움직임을 남기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미세한 전진을 오래 붙잡아 내 삶의 사건을 한 줄씩 기록하고, 거창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지 않더라도 내가 쌓아 올린 이야기들이 멈추는 그 지점이 조용한 결말이 되어 주는 순간이 나의 끝이길 바란다.
by so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