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톤먼트, Atonement (2008)

”진실만을 쓰기로 했어요. 변명도, 미화도 없는.“

by 소서


Atonement ; 속죄


1935년 영국, 부유한 집안의 아름다운 딸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는 시골 저택에서 여름을 보내던 중 집사의 아들이자 명문대 의대생 로비(제임스 맥어보이)와 마주친다. 어릴 때부터 서로에게 애틋한 마음이 있었지만 쉽게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던 이들은 그날 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이들을 지켜본 세실리아의 동생 브라이오니의 오해로 로비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전쟁터로 끌려가게 된다.

이후 세실리아는 로비가 전쟁터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간호사로 일하게 되고, 로비 또한 세실리아를 다시 만난다는 단 하나의 일념으로 전쟁터에서 살아남는데…

/ synopsis




진실과 선입견

오해와 이해

속죄와 사죄


나는 종종 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믿는 순간, 그리고 그가 옳다고 판단되는 순간에 그 판단이 과연 진실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 묻게 되는데, 그 질문은 언제나 확률의 문제로 귀결된다.


진실일 가능성이 거짓보다 조금이라도 높다면 그것을 진실로 분류할까?

반대로 거짓의 확률이 더 높아지는 순간 그것을 의심을 시작하고 있나?


그 경계는 어디쯤일까

아니, 나는 그 경계를 끝까지 확인할 의지가 있나


확률이 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어제까지의 진실이 오늘의 거짓이 된다면, 나는 그 변화 앞에서 머뭇거린다. 내가 알고 있던 기억과 판단, 신뢰와 확신을 모두 삭제하고,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며 속죄로 나아가는 그 긴 과정 앞에서 그저 과거에 했던 판단을 흐릿하게 만드는 게 더 편할 거라는 생각이 들이차기 시작한다.


속죄란 잘못에 대한 대가를 외부가 아닌 자신에게서 먼저 묻는 행위라 말한다. 그러나 그 감당이 타인에게까지 닿고 있는지는 지켜보지 않는다.





<어톤먼트〉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범인이었는가가 아니라, 누가 범인으로 확정되었는가였다.


브라이오니는 분수대 앞에서 목격한 장면들과 로비의 편지 속 문장만으로 그를 가해자로 확정한다.

가족들은 딸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지는 못했지만, 로비를 범인으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쉽게 기운다. 로비는 가정부의 아들이었고, 그 계급적 위치는 그를 쉽게 의심 가능한 존재로 만들었다.


로비 역시 자신이 그 위치에 있었기에 지목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는 그 선입견을 증오하지만, 그 증오는 다른 대상에게 그대로 이전되었다. 세실리아와 로비는 집사의 아들을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이 장면들은 선입견이 도덕이 아니라 구조임을 보여준다.


진짜 범인은 상류층 사업가 폴 마샬이었다.

부유하고, 잘 교육받은 사람은 의심의 중심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설령 의심을 받더라도 그의 말은 더 큰 무게를 얻고, 상대는 그 의심 위에 쉽게 확신을 얹지 못한다.


그녀는 어렸고, 그는 오해받을만한 태도를 보였으며, 그녀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이해라는 이름의 거리감에 도달했다. 그래서 그녀는 속죄했다. 사죄하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고, 그 지연된 시간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그들이 원했을 법한 결말을 그녀의 책 속에서 대신 완성해 주는 일이었다.


그녀에게 이 과정은 뒤늦은 정의였다. 그녀는 자신의 태도가 나약함으로 회피하지 않고 직면한 태도이며 그것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자신의 친절이라 한다.


속죄는 당위적이며 사죄는 선택이고 친절은 선행이었다.




우리는 선입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성장하고, 환경이 바뀌고, 경험이 쌓여도 선입견은 사라지지 않고, 더 정교한 형태로 교체될 뿐인가


우리는 혼자 언어를 익히지 못하고, 혼자 사고하지 못하며, 혼자 자라지 못한다. 각자는 공동체 안에서 말하는 법과 판단하는 법을 배우고, 이미 정해진 프레임을 통과하며 세계를 이해하는 법을 습득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서로 다른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그 일원만이 가질 수 있는 시선으로 수많은 조건과 환경의 차이를 관찰한다.


그렇게 형성된 시선은 곧 판단이 되고, 판단은 언제나 특정한 방향을 향한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내가 잘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거짓의 가능성에서 제외되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당신은 이미 한 번 거짓으로 분류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언제든 의심받을 준비가 된 존재가 된다. 당신은 그런 전력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고, 그럴 만하며, 결국 그렇게 여겨진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잘 모르면서도 안다고 말할 수 있고, 자세히 본 적 없으면서도 늘 봐왔다고 주장할 수 있다. 내가 본 것이 진실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틀렸다면, 그 오류는 당신의 계급, 국적, 성별, 인종, 직업, 종교, 학력 같은 이미 부여된 조건들 속으로 흩어진다. 그렇게 책임이 분산되는 순간, 나의 판단은 개인적 오류가 아니라 구조적 불가피성이 된다.




진실은 힘이 없다.

힘을 갖는 것은 언제나, 진실이 향하는 방향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가장 흥미로운 진실이 누구를 향할 때 가장 수월해지는가이다.


잘못 겨냥된 진실은 곧 거짓이 되고, 그 거짓을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사람에게로 조용히 전달된다. 그러다 우연하게 진실의 윤곽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속죄한다. 그 속죄는 비겁함도 회피도 아닌 얼굴을 하고, 베풀듯이 선한 얼굴로 이뤄진다.


나는 진실에 집착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진실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집착해 온 것은 결국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감각이었다.


선입견은 바로 그 나약함을 보호한다. 판단을 단순하게 만들고,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안도감을 제공하며, 옳은 것을 믿기보다 믿는 것을 옳게 만드는 길이 훨씬 수월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설득한다. 내가 믿어온 세계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나는 그것을 보지 않기 위해 시야를 가리고 의심을 밀어낸다. 그렇게만 하면 계속 옳은 편에 머물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그 착각이 곧 나의 세계가 되고, 나는 그 세계를 진실이라 부르며 지켜낸다.


그러나 이따금, 내가 진실이라 믿었던 것이 거짓으로 기울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당신에게 깊이 속죄하겠다. 그것은 사죄를 회피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내가 오해한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의 친절이라고.


이 지점을 영화에서 타인의 이야기로 관찰한 ‘나’는 분노했지만, 그 분노는 금세 모양을 바꾸었다. 나는 분노하는 위치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한 문장의 질문이 떠올랐기 때문에.




지금의 세상에서는 한 줄의 문장으로, 때로는 단 하나의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진실이 되는 것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니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 진실을 바로잡기보다 또 다른 진실을 만들어내는 일에 더 쉽게 매혹된다. 이미 흥미를 잃은 거짓을 입에 물고 씹는 일은 껄끄러운 자갈을 삼키는 것처럼 불쾌하니, 차라리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 전시하는 편이 훨씬 수월해졌기 때문에.


내가 보는 시야로, 내가 사용하는 언어로, 내가 믿고 싶은 방향으로 하나의 진실을 만들어 수많은 진실들 사이에 진열하는 일쯤은 너무도 쉽다. 설령 그 진실이 어느 날 거짓으로 뒤집힌다 해도, 그 무렵에는 이미 수많은 진실들이 함께 뒤집혀 있을 것이고, 내 거짓은 그 안에서 쉽게 묻힌다.


그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가장 큰 거짓을 만든 누군가의 사죄뿐이며,

나는 잠시 속죄하는 마음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 속삭인다.


무서운 것은 이 과정이 전 세계에서, 매일, 매시간 반복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작은 칼을 쥐고 휘두른다. 그 칼은 혼자서는 생채기 하나 남기기 어려울 만큼 가볍고 얇지만, 그렇게 모인 수많은 작은 칼 앞에서 누군가가 결국 베여나간다.


베어진 뒤에도 칼을 쥔 사람들은 말한다.

내 칼은 고작 이 정도였다고,

이건 내 짓이 아니라고.

누군가는 더 큰 칼을 들고 있었을 것이고, 애초에 그 사람이 약했을 것이며, 이번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미 베어져 있던 사람일 것이라고.


그렇게 다시 한번 자신들만의 진실과 정의로, 눈앞에서 난도질당한 존재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덮어버린다. 보이지 않는 순간부터는 진실도 거짓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손에서 칼날이 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 우리 자신은 꽤나 선하고, 때론 정의로우며, 나름 옳은 것을 보려 애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손은 잔혹하기보다는 부드럽고 따뜻하다고 믿는다. 실제로 내 눈앞에 놓인 내 손은 따뜻한 온기를 지니고 있고, 어느 날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체온을 나누고, 누군가의 등을 토닥이며, 울음을 받아내는 손이기도 하다.


나는 내 손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나의 손으로 누군가를 난도질할 수는 없다고 확신한다.

나의 확신을 믿는다.


그 진실이라 믿은 것들이 날카로움을 품고 누군가를 베는 무기가 된다면, 그것은 언제나 내 손이 아닌 다른 이의 손에서 태어난 이야기일 것이다.

내 손에서는 그런 잔혹함이 나올 수 없다는 이 확신을 믿는 한, 나는 그 무거운 죄책감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속죄는 깊이 하겠지만,

사죄라는 이름으로 내 손의 칼날을 꺼내 보이진 않으며.


드러내는 순간,

내가 품어온 선입견의 화살이 방향을 틀어 나를 겨냥할 것이고, 곧장 거짓의 프레임 속에 갇히는 것은 내가 될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보편적인 선입견 사이에 숨어

누군가의 희생을 관찰하며

아무도 모르게 속죄하겠다

더 안전하고, 더 편안하게.


작가의 이전글시절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