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자백의 대가 (2025)

흥미를 주는 진실

by 소서
남편을 죽였다는 혐의로 궁지에 몰린 여자. 그녀에게 의문의 여인이 다가와 거래를 제안한다. 그 사건을 대신 자백해 주겠다는 약속. 하지만 그 대가로 누군가의 목숨을 가져와야만 한다.

/ synopsis

기사는 언제나 한 줄의 제목으로 사건을 단숨에 설명한다. 그 한 줄은 사건을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분류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옳음과 그름, 믿을 수 있는 얼굴과 지워도 되는 얼굴.


그 순간부터 한 인간의 삶은 서사에서 삭제되고 역할만 남는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의 말은 더 이상 말이 아니다. 이미 낙인이 찍힌 뒤에 발화된 모든 문장은 변명으로 번역되고, 설명은 자기 합리화로, 침묵은 죄의 인정으로 오독된다. 사회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가 아니라, 왜 말하는지를 먼저 의심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자백의 대가>에서 주인공이 범인으로 몰리고, 그 누명을 벗어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이 익숙한 구조를 다시 확인했다. 그 작품 속 한 대사는 이 시대의 진실이 어떤 기준으로 소비되는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얼마나 흥미를 느끼느냐죠
사람들이 언니의 말을 믿지 않았던 건
언니의 진실이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자백의 대가>, 모은役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얼마나 흥미를 느끼느냐는 말.

사람들이 한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던 이유는 그 진실이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충분히 자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냉정한 진단. 그 문장은 극 중 인물에게 향한 말이었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 전체를 향한 고발처럼 들렸다.


남편을 죽였다고 자백까지 하면서 말했어요.
억울하다고만 외치면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자백의 대가>, 장정구•백동훈 대화 中


우리는 진실을 판단한다고 믿지만, 실은 흥미를 평가한다. 얼마나 분노를 자극하는지, 얼마나 단순하게 요약 가능한지, 얼마나 빨리 공유할 수 있는지에 따라 말의 운명이 갈린다. 복잡한 진실은 맥락을 요구하고, 맥락은 시간을 요구하며, 시간은 피로를 요구한다. 반면 선명한 악과 명확한 가해자는 즉각적인 감정을 제공한다. 그래서 진실은 설명될수록 손해를 보고, 의혹은 압축될수록 힘을 얻는다.


처벌이 확정된 이후에도 이 구조는 멈추지 않는다. 판결은 종결이 아니라 또 다른 심판의 시작이 된다. 처벌이 약하다, 잘못은 분명히 있어 보인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는 말들이 공기를 채운다. 법정에서 오간 수많은 진술과 반박, 증거와 맥락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보지 못한 것은 없었던 일이 되고, 남은 것은 이미 잘못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다. 그 이미지는 사실보다 오래 남고, 설명보다 쉽게 재생산된다.


판사는 충분히 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는 듣지 않았다. 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판결에 대해 불만을 말하고 의심을 던진다. 이 불신은 특정 사건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오랜 시간 누적된 기억의 반사다. 처벌이 늘 약하다고 느껴졌던 경험, 법이 현실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감각, 정의가 선택적으로 작동해 왔다는 의심이 사건마다 자동으로 호출된다. 그렇게 사회는 판결 이전에 이미 결론에 도달해 버린다.


처벌이 신중한 이유는 억울한 사람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함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신중함의 틈을 가장 능숙하게 빠져나간 이들이 누구였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 틈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였고, 자본과 권력은 그 구조를 반복적으로 학습해 왔다. 법의 빈칸은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말로 정당화되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제거할 수 없는 허점처럼 관리되어 왔다. 그 결과 그 틈에 끼여 숨이 막힌 것은 언제나 동일한 계층, 동일한 위치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분노를 배출할 수 있는 통로는 많지 않다. 제도는 멀고, 법은 어렵고, 설명은 복잡하다. 남은 것은 여론뿐이다. 그래서 여론은 점점 더 단순해지고, 더 빠르게 분노하며, 더 잔혹해진다. 그것은 진짜 억울한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언어라기보다, 사회가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된 제도를 대신해 작동하는 임시적 처벌 장치에 가깝다. 법이 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일을 여론이 대신 수행하고, 판결이 미완처럼 느껴질수록 비난은 과잉으로 증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에서 강한 자들은 종종 빠져나가고, 남겨진 자들은 더 오래 호출되기도 했다. 다만 이제는 처벌이 아니라 꼬리표가 남는다. 법의 빈틈을 통과하더라도, 프레임은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는 정의의 확장이 아니라 응징의 외주화에 가깝다. 누군가를 계속해서 문제의 인물로 호출하고, 그 이름 앞에 설명 대신 낙인을 붙이는 방식으로 사회는 스스로의 분노를 관리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손쉽게 포기되는 것은 진실이다.


진실은 더 이상 중심에 있지 않다. 누군가에게 문제가 발생했고, 그 문제가 사회적으로 비판 가능한 유형에 속하며, 그 사람이 비난받기에 충분해 보인다는 인상만으로도 충분하다. 신뢰를 자산처럼 사용해 왔던 개인이나 집단은 문제가 제기되는 순간 그 자산을 상실한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회복 가능성은 고려되지 않는다. 이 사회는 사과 이후의 언어, 책임 이후의 시간을 아직 설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흥미를 잃은 진실은 방어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우리는 법을 믿지 못한 채 법을 흉내 내고, 판단을 유보하지 못한 채 정의를 말한다. 이해되지 않은 사정은 삭제되고, 설명되지 않은 공백은 상상으로 채워져 확신으로 굳어진다. 그 결과 사회는 더 단단해지는 대신 더 거칠어지고, 더 안전해지는 대신 더 쉽게 누군가를 밀어낸다. 진실이 흥미를 이기지 못하는 사회에서 남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정서이고, 판단이 아니라 반사다.


그리고 그 반사는 언제든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누군가를 가해자로 만드는 데 사용된 속도와 확신은,

결국 우리 모두를 향해 되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만이 이 구조에서 유일하게 공평하다.



by so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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