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카운터 앞에서 잠시 걸쳤던 표정을 모두 지워낸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녀 앞에 놓인 커피는 마셔지지 않은 채 온도를 비워나가고 있었다.
평온하다기보다는, 오르내리는 감정의 진폭 자체를 증오한 끝에 더는 어떤 정서도 수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의 얼굴에 가까웠다. 감정을 비워낸 것이 아니라 담지 않기로 선택한 표정. 그 무표정은 가을의 온기를 지우고 겨울을 앞당기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빨대를 들어 커피를 휘젓는 시늉을 했다. 음료를 섞기 위한 동작이 아니라 손에서부터 느껴지는 공허를 견디기 위한 최소한의 움직임이었다.
휴대폰을 잠시 쥐었다가 이내 내려둔다.
무언가를 쥐여 보려 마디에 내내 힘을 주고 살았던 사람의 체념처럼
그녀의 손은 이제 더는 무엇도 쥐려 애쓰지 않겠다는 듯 펴진 채로 무릎 위에 놓여 있다.
창문 밖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표정을 짓지 않아도, 어떤 행위를 지속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은 응시였다. 그러나 완전히 고요한 것은 아니었다. 숨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시선이 머무는 동안 눈꺼풀 아래로 아주 작은 긴장이 쌓였다.
눈꺼풀은 무거운 긴장을 의식한 듯 계속해서 아래로, 아래로, 감기고 다시 무겁게 들어 올려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풍경 전체를 보지 않는 듯했다. 창문 너머, 시야에 정확히 걸려 있는 한 그루의 은행나무만을 응시했다. 같은 풍경 속에서 발생하는 변화만을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오직 한 지점만을.
은행잎이 떨어지고, 은행이 떨어진다.
그녀는 한 계절을 한 그루의 나무만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그 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차량들, 구름과 해조차도 그 나무가 놓인 지점을 통과해야만 그녀의 시야에 들 수 있었다. 그녀가 보는 것은 대상이 아니었다. 눈동자에 담겨 들어온 것이 대상이 되었다.
그 대상들이 시야를 벗어나면 그녀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녀 스스로 대상을 담지 않았고, 떠나보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어떤 것들은 어느샌가 들어와 예고 없이 사라졌다.
그 반복이 그녀의 공허를 빗어내고 있었던가.
어느새 그녀의 맞은편에 남자가 앉았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머물러 있었다. 응시는 그를 비껴갔지만, 배제라기보다는 유예에 가까웠다. 그는 아직 존재가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세계 어딘가에, 곧 불러올 수 있는 이름처럼 놓여 있었다.
신호를 보내야만 하는 남자와,
신호가 도착했을 때만 응시할 수 있는 여자.
남자는 선뜻 신호를 보낼 수 없었다. 그녀가 오래 유지해 온 주변의 고요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 고요를 파열시킨 뒤 마주하게 될 그녀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걸까. 자신을 담고 난 뒤에도 나무를 담던 그녀의 눈동자의 온도가 그대로라면, 혹은 차오른 감정의 결이 그가 기대한 것과 다르다면—
그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두려웠나.
한때,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살결이 맞물리는 순간들이 늘어날수록 그녀의 시야에 오직 그만이 담겼던 시간도 있었다. 그것은 그를 충만하게 채웠고, 이제야 자신의 시간이 그저 가는 것이 아니라 흘러간다는 감각을 알려주었다.
그가 담긴 그녀의 눈동자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던, 별이 박힌 눈동자였다.
그는 그 눈부심을 그녀를 통해 처음 보았다.
그러나 그 빛은 오래전 스쳐 지나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서서히 퇴색되었다. 상영되던 장면은 다른 기억들과 뒤섞여 남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 눈빛을 정확히 떠올릴 수 없었다. 막이 내린 뒤 꺼진 스크린처럼, 말하던 사람도 담아내던 사람도 그 공간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 남은 진실은 하나뿐이었다.
그 눈빛을 담았던 여자가 존재했다는 것.
색도, 향도, 형태도, 감촉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있었다는 사실만을 잠시 내 눈앞에서만 스쳐갔던 입김처럼 어슴푸레 남았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자신의 앞에서 텅 빈 눈으로 창밖의 나무를 응시하고 있는 이 여자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텅 빈 눈을 직시한 그의 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신호를 온몸에 보내왔다. 그 혼란 속에서 그는 힌트를 얻고 싶었는지, 그녀에게 존재의 신호를 보냈다. 예전의 눈빛을 잠시 떠올렸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마주해 혼란을 잠재우고 싶어졌다.
그는 알았다. 그녀가 보내왔고 자신에게 담겼던 그 순간은 분명 사랑의 형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선명하지 않았고 기록되지 않았기에 잊혔다고 믿어왔던 기억의 현장들 속에서, 사랑의 파편만은 유난히 또렷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
그녀는 메마른 두 눈을 몇 차례 천천히 깜빡이며 그를 초점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아주 짧게 숨을 고르는 동작을 했다.
미세했지만 얼굴 전체로 번지는 표정이 있었다.
이 만남이 처음부터 그녀의 목적이었음을 고백하듯, 그가 기억해 온 시간들이 그녀에게도 동일한 형태로 공유되어 왔다는 사실이 비로소 사실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말을 하려다 멈춘 것이 아닌, 말을 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의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그를 묵묵히 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혼란에서 빚어진 불안이 그의 몸을 의자에 깊숙이 눌러 앉혔다.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녀가 과연 같은 시간을 통과하며 유사한 기억을 축적했는지, 그를 벗어난 자리에서의 그녀의 눈동자와 얼굴은 그가 알고 있다고 믿어왔던 모든 것을 흔들어 놓았다.
그는 그녀를 끊임없이 입력해 왔다.
눈동자의 결,
얼굴에 접히는 주름,
차분하지만 다정한 온도를 띤 목소리.
그러나 그 모든 기록은 결국 그의 것이었다.
그의 언어로 번역된 그녀였다.
그 안에 실제 그녀가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도 없을 수도 있다는 직감이 겨울초입의 쌀쌀한 한기처럼 서서히 살갗에 서린다. 그는 이제 그녀를 모른다고 말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담고 있었다.
더 이상 그 응시는 비어 있지 않았다.
오래전처럼 무언가를 기대하지도, 이전처럼 완전히 닫혀 있지도 않은 상태였다. 다만 그를 향해 잠시 열어둔 창과 같이 남자를 눈동자에 오롯이 담을 뿐이었다.
그의 눈에서 서서히 초점이 사라진다.
그녀가 오래 지니고 있던 텅 빈 눈이 어느덧 그의 것이 되었다.
그녀는 볼 수 있었고,
그는 이제 모른다.
공허가 뒤바뀐다.
by so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