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연작의 첫 번째 영화 : 자유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연작은 프랑스 국기의 파랑, 하양, 빨강과 그에 겹쳐진 자유, 평등, 박애의 말을 빌려 서로 다른 삶의 얼굴을 비춘다. 다만 이 시리즈는 그 거대한 말을 직접 설명하기보다, 상실과 욕망, 우연과 연결을 통과하는 한 사람의 시간을 통해 그것들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보여준다.
블루는 그 첫 번째 영화로, 자유가 정말 단절의 다른 이름일 수 있는지를 끝까지 묻는다.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고 혼자 생존한 ‘줄리’는 절망에 빠진다. 고독 속에 고통하던 ‘줄리’는 가족의 흔적을 모두 지우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보금자리, 낯선 인물들을 찾아 떠난다. 그곳에서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며 조금씩 변화해 나가는 ‘줄리’는 스스로를 억압하던 구속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유를 되찾기로 결심한다.
/ synopsis
이 영화는 삶이 지속되는 한 연결은 끝내 피할 수 없다는 사실, 다시 말해 단절이 얼마나 자주 실패하는지를 보여준다. 끊어내고 멀어지려 해도 기억은 불쑥 손에 쥐어지고, 사람은 예기치 않은 순간 다시 스치며, 한때 함께 만들었던 음악은 거리에서 되살아난다.
죽음조차 모든 것을 한 번에 끊어내지는 못한다. 내가 어떤 존재를 기억에서 밀어낼 수는 있어도, 생의 어느 순간 얽혔던 타인의 기억까지 지울 수 있는 권능은 누구에게도 없다.
관계는 끝났어도 흔적은 남고,
사라졌다고 믿은 것은 다른 경로로 되돌아온다.
영화는 바로 그 불가피한 연속성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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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는 가족의 죽음 이후 삶으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떼어내려 한다. 재산을 정리하고, 집을 떠나고, 음악에서 멀어진다. 더 이상 누구와도 얽히지 않겠다는 듯 자신을 비워낸다. 그러나 영화는 그 결심이 처음부터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집요하게 드러낸다.
푸른 샹들리에는 뜯어내도 손에서 잔광을 남긴다. 버렸다고 믿었던 악보는 복사본의 형태로 어딘가에 보존되며, 남편과 함께 만든 멜로디는 거리의 악사를 통해 낯선 얼굴로 되돌아온다. 남편의 내연녀가 품고 있는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줄리가 지우려 했던 과거는 끝내 새로운 생명의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
이 장면들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반복이 아니다. 영화는 한 인간의 삶이 결코 단독으로 닫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손에 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기억 위에 살아가고, 그 기억은 의지와 무관하게 몸과 시간 속에 축적된다.
상실 이후의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잊고 싶다는 욕망과, 결코 완전히 잊을 수 없다는 현실이 계속 충돌하기 때문이다. 줄리의 비극은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그들을 잃은 뒤에도 여전히 그들과 연결된 채 살아야 한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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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단절은 선택이 아니라 환상에 가깝다. 줄리는 죽음에 가까이 가기 위해 약을 삼키지만, 그마저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고통보다도 그 일로 피해를 입을 간호사와 병원을 먼저 걱정한다. 이 장면은 스스로를 완전히 끊어내는 일조차 인간에게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인간은 마지막 순간에도 타인과의 관계를 의식한다. 죄책감이든 연민이든 책임감이든, 그 감정들은 죽음조차 철저히 개인적인 사건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이후에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영향 주지 않고, 누구에게도 영향받지 않는 상태를 원한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세계와의 관계를 뜻한다. 문을 닫아도 외부의 소음은 스며들고, 세상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다시 안쪽에 도달한다.
영화는 이 지점을 집요하게 밀고 간다. 줄리는 세상과 단절하겠다고 결심하지만, 창고의 쥐를 처리하지 못하고, 남편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외면하지도 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의 선함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다. 인간은 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 고립은 가능할지 몰라도 단절은 완성되지 않는다. 줄리가 거부했던 것은 타인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구성되어 온 자기 자신의 일부이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세계를 밀어내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세계에 묶인 존재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단절을 향한 모든 시도는 결국 또 다른 연결의 증거가 되고, 고립은 세계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아닌 여전히 세계 안에 머문 채 세계를 거부하려는 몸짓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끊임없이 감정을 지워내는 과정을 그리지 않고 감정이 다시 흐를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일로 그린다. 줄리가 마지막에 흘리는 눈물은 단순한 슬픔의 표출이 아니다. 오랫동안 억눌러온 감정이 비로소 몸 밖으로 흘러나오는 신호이며, 스스로를 가두며 마비시켰던 감각들이 다시 깨어나는 순간이다.
상처받지 않으려 선택한 '외면'은 자신을 지켜주는 방패였지만, 동시에 그 무엇도 통과시키지 않는 벽이 되어 자기 자신을 고립시킨다. 들여다보지 않겠다고 결심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덮인 채로 남아 있다가 결국 냄새와 얼룩의 형태로 되돌아온다. 썩는 것은 반드시 기척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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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세 가지 색: 블루〉는 상실을 극복하는 영화가 아니다. 상실 이후에도 지속되는 삶의 구조를 받아들이는 영화다. 여기서 순응은 체념과 다르다. 그것은 모든 것을 통제하고 끊어낼 수 있다는 환상을 포기하는 일이다. 삶은 선택의 결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억, 흔적, 타인, 우연, 되돌아옴 같은 비자발적 요소들이 삶을 계속 구성한다. 줄리가 끝내 도달하는 것도 평온이 아니라 이 사실에 대한 수긍이다. 살아 있는 한 인간은 단절보다 연결에 더 많이 속해 있다. 이 영화는 그 단순하고도 잔혹한 사실을 가장 차갑고 정확한 방식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