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Typing Vol.1: 봉합되지 않은 문장들

매거진 『타이핑』 1호 서평

by 소서


아트인사이트와 엘엠디엘프레스의 협업으로 매거진 <타이핑>이 창간되었다. <타이핑>은 글쓰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매거진이다. 글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계기나 경험, 조건 속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고 지속하게 되는지를 있는 그대로 담고자 했다. <타이핑>은 글쓰기를 하나의 기술이나 성취로 바라보기보다 일상적인 행위이자 반복하는 선택의 과정으로 바라본다. 이 매거진은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가 쓰며 살아가는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응원하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타이핑> 1호에는 총 서른일곱 명의 에디터가 참여했다. 에디터들은 글쓰기에 관한 기억, 추억, 충동과 실행, 실패 혹은 성장의 기록을 꾸밈없이 써 내려간다. 어떤 순간에 쓰기를 시작했는지 혹은 멈추었는지, 다시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충동적으로 시작한 메모나 실패로 남은 초고에 관한 기억도 여과 없이 담았다. 이를 통해 글쓰기가 단선적인 성장 서사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고쳐지고 갱신되는 경험임을 드러낸다.

글쓰기의 출발점과 초안을 다루는 글은 드래프트 Draft, 실수와 실패, 되돌림의 과정을 기록한 글은 컨트롤 제트 Ctrl+Z로 분류했다. 에피소드나 바깥의 이야기를 다룬 글은 마진 노트 Margin note에 배치했다. 이렇듯 카테고리명을 실제 타이핑 환경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차용하여, 각 글의 성격과 방향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이 밖에도 사회의 문제의식을 드러낸 글은 커서 Cursor, 작가와 작품을 다룬 글은 인서트 모드 Insert mode로 구분했다. 독자가 이러한 구조를 따라 나름의 재미를 매거진 안에서 찾고 누리길 바란다. 또한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쓰며 살아가는 삶 또한 탐색해 나가길 제안한다.

/ Typing Vol.1




/ 쓰는 사람들의 시작



쓰는 사람들에게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스치는 생각을 그냥 흘려보내지 못해 기록을 시작하고, 시간이 한참 지난 뒤 그 기록을 다시 들춰보다가 그때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자기 마음의 결을 뒤늦게 발견한다. 그렇게 남겨둔 문장이 누군가에게 가닿아 공감으로 돌아오는 순간, 사람은 단지 위로받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위안이 불러오는 은근한 중독에도 조금씩 길들여진다. 쓰는 일은 대개 거창한 목표보다 먼저, 흘려보내지 못한 마음 하나를 깊이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한다.


연결의 통로는 무수히 많아졌지만, 정작 마음이 닿는 자리는 갈수록 흐릿해진다. 어렵게 마주 앉아도 서로의 말을 오래 받아 적기보다 각자 쌓아온 이야기를 풀어놓기 바쁘다. 그 바쁜 사람들의 시선을 붙드는 것은 늘 조금 더 깊고 은밀한 자기 고백이다. 쉽게 흘러가는 말보다 안쪽을 건드리고, 겉면보다 내막을 더 많이 드러내는 문장 앞에서 사람들은 조금 더 오래 머문다.


그래서 쓰는 사람은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내 보이려 한다. 그러나 그 깊이가 언제나 날것의 진실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더 깊은 고백처럼 보이도록, 더 은밀한 마음인 것처럼 읽히도록, 이야기는 몇 번이고 손질되고 계산된다. 진솔함은 종종 치밀하게 연출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타이핑』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그 연출된 결과만이 아니라, 그 문장에 닿기까지 미처 말끔히 봉합되지 못한 흔적까지 함께 들여다본다는 데 있다.


아트인사이트와 엘엠디엘프레스가 협업한 매거진 『타이핑』 1호는 바로 그 덜 봉합된 문장들이 지닌 힘을 믿는 책이다. 서른일곱 명의 에디터는 글쓰기의 충동과 실패, 지속과 망설임의 기록을 각자의 언어로 풀어놓는다.


언제 쓰기를 시작했는지, 왜 멈추었는지, 다시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충동적으로 적어둔 메모와 실패로 남은 초고까지 비교적 꾸밈없이 드러낸다. 이 책에 흐르는 것은 반듯한 성장담이 아니다. 지우고 고치고 다시 쓰는 동안 달라지는 것은 문장만이 아니라, 그 문장을 붙들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사실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 매거진의 매력은 글을 분류하는 방식에서부터 시작된다. 글쓰기의 출발점과 초안은 ‘드래프트(Draft)’, 실수와 되돌림의 과정은 ‘컨트롤 제트(Ctrl+Z)’로 명명하고, 실제 타이핑 환경의 언어를 목차로 끌어온다.


이 구조를 따라가다 보면 글쓰기가 멀리 있는 창작 행위라기보다, 지우고 망설이고 다시 눌러쓰는 손끝의 움직임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시작 직전의 머뭇거림, 삭제 직후의 공백, 차마 버리지 못하고 남겨둔 문장들, 완성되기 이전의 그 단계들까지. 『타이핑』은 다듬고 버려지기만 했던 처음의 순간들을 전면으로 끌어올린다.




/ 쇼윈도와 실행취소 사이



글은 마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매장의 쇼윈도와 같다. 나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내가 신중히 진열해 둔 나의 일부에 불과하다. 아무도 섣불리 그것을 건드리고 재배치할 수 없으며, 나는 그 안에서 안전함을 느낀다.

/ 정혜린 에디터 (p.16)

오래 시선을 붙든 문장이었다. 정확해서라기보다, 내가 오래 감춰온 방식의 정체를 먼저 들킨 듯한 익숙함이 앞섰다. 나는 더 나다운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퇴고 전까지 수없이 문장의 살을 깎아낸다. 부끄러운 초고는 드래프트 폴더 깊숙이 밀어 넣고, 그럴듯하게 손질된 문장만을 쇼윈도 앞으로 내놓는다. 그렇게 편집된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의 애정에는 안도하면서도, 편집되지 않은 날것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자꾸만 몸을 사리게 된다.


알아봐 주기를 바라면서도 온전히 들키고 싶지는 않은 마음,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허술함이 오래 기억될 관계는 피하고 싶은 마음. 그 이중성은 생각보다 깊게 글쓰기의 안쪽에 눌어붙어 있다.


『타이핑』이 인상적인 이유는 잘 다듬어진 결과만을 앞세우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그 결과에 닿기까지 작가들이 겪었을 민망함과 자기검열,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과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 사이의 왕복까지 함께 남겨둔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글쓰기의 성취보다, 그 성취에 닿기 전까지 계속 자신을 의심하고 손질해야 했던 시간 자체가 더 선명하게 남는다.


삶에는 Ctrl+Z가 없지만, 글쓰기에는 ‘실행취소’가 있고, 그 사실이 나를 안심시키면서도 동시에 겁나게 한다. 그만큼 지울 수 있었음에도 남긴 문장들에 나는 책임감을 느낀다.

/ 조유리 에디터 (p.79)

‘컨트롤 제트(Ctrl+Z)’라는 챕터에서 이 문장을 마주했을 때, 책은 곧장 현실 쪽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문장 안에서만 유효한 줄 알았던 실행취소의 감각이 삶 쪽으로 번져왔다. 삶에는 실행취소가 없다. 뱉어버린 말의 실수를 뒤늦게 깨닫고 상대의 연락을 기다리는 시간, 10분 간격으로 오가던 답장이 어느 순간 15분으로 늘어났을 때 느끼는 피 말리는 죄책감 앞에서는 어떤 합리화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흔적 없이 지울 수 있는 타이핑은 분명 안도감을 준다. 그러나 수정과 삭제의 기회를 거치고도 끝내 남겨두기로 선택한 문장에는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 뒤따른다. 지울 수 있었는데 남긴 말, 고칠 수 있었는데 끝내 내보낸 문장들은 빠져나갈 틈도 없는 자리에 나를 붙들어 놓는다.


그 시간을 버티기 위해, 그러나 현실의 흉터를 정면으로 들여다볼 용기는 없어서 우리는 타인의 상처를 참고서처럼 뒤적인다. 용서받을 용기 없이 통증을 붙든 채 지나가기로 한 밤, 나와 비슷하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낸 사람들의 글에 오래 잠기다 보면 어느 순간 날카로웠던 통증도 조금씩 무뎌진다. 해결할 힘이 없어 우회한 채 머물렀을 뿐인데, 어떤 밤들은 그 우회 덕분에만 지나가기도 한다는 사실이 우습게도 나를 버티게 했다.




/ 끝내 기록하는 사람들



『타이핑』은 단순한 글쓰기 과정을 담은 책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공개할 수는 없지만 끝내 기록 쪽으로 기울어지고야 마는, 불안하고 모순적인 사람들의 망설임이 이 책 안에 모여 있다. 쓰고 싶지만 들키고 싶지는 않은 마음, 남기고 싶지만 남겨진 뒤를 견딜 자신은 없는 마음, 솔직해지고 싶지만 끝내 가공을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 이 책에 실린 문장들은 저마다 다른 경험 속에서 쓰였지만, 그 아래를 흐르는 불안만큼은 묘하게 닮아있다.


편집자의 말에 적힌 “그냥, 지금, 계속”이라는 문장은 거창한 성취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어쩌면 쓰기를 지속하는 일, 더 정확히는 끝내 쓰는 쪽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멋진 문장을 완성하는 능력보다, 미처 정리되지 않은 상태의 자신을 견디며 계속 문장 쪽으로 돌아오는 힘. 『타이핑』은 바로 그 고집스럽고 사소한 지속을 이야기한다.


나는 문장을 끝까지 읽어주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나의 이기심이 담긴 글을 받아준 사람들.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완성된 문장을 몇 줄 훑고 지나가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일부와 잠시 같은 자리에 머무는 일에 가깝다. 때로는 그가 끝내 다 말하지 못한 결핍의 가장자리에 잠시 머무는 일이다. 쓰는 사람은 그 사실만으로도 다시 버틸 힘을 얻는다.


읽는 사람들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마다 후회와 자책이 쌓인 밤을 지나왔을 것이고, 어딘가에 미처 봉합되지 못한 흉 하나쯤은 품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 역시 어디에선가 조금 이기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표출하며 살아가기를 바라게 된다. 누군가는 글로, 누군가는 감정으로, 누군가는 서툰 말로, 누군가는 지워지지 않은 흔적으로. 잘 정리된 고백이 아니어도 좋다. 사람은 대개 그렇게 조금씩 새어 나온 흔적들로 자신을 다독이며, 멈추지 않는 커서를 따라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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