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은 조용히 온다

<핵개인사회> 34화

by 신 작가 수달샘

윤호는 회의실이 아닌

작은 면담실로 불렸다.


유리 벽,

낮은 의자,

물 한 컵.


공식적인 공간이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분명한 자리였다.


“징계는 아닙니다.”

상대는 먼저 그렇게 말했다.


윤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무엇을 덜어내기 위한 문장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역할을 조금 조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조정.


윤호는 그 단어를
속으로 천천히 되뇌었다.
부드러운 말이었지만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대외 발언이 잦아질 수 있는 위치는
당분간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윤호는 묻지 않았다.
얼마나, 왜, 누구의 판단인지.


질문은
대답을 바꾸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는 계속하셔도 됩니다.”


말은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명확했다.


허용되는 것과
비켜나야 하는 것이
조용히 나뉘어 있었다.


윤호는 면담실을 나왔다.


복도를 지나
자기 자리로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는 업무 메일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하나가 옮겨졌다.


윤호의 이름이 붙어 있던 회의가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같은 시간, 같은 주제,
다른 사람의 이름.


윤호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모니터를 껐다.


꺼진 화면에는
자신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서도
같은 얼굴이 따라왔다.


달라진 건 없었다.


그래서
조금 늦게 와 닿았다.


변화는
모양이 아니라
위치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집에 돌아왔을 때,
윤호는 현관에서 잠시 멈췄다.


오늘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부엌 불은 켜져 있었고
미라는 보이지 않았다.


식탁 위에 메모 하나가 놓여 있었다.


늦을게.


윤호는 컵을 꺼내

물을 따랐다.


물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서아의 방문은 열려 있었고,
안에서는 키보드 소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윤호는 그 소리를
잠시 들었다.


말을 한 뒤,
무언가를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 자리에 다른 것이 놓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는
그대로 남지 않는다.


무언가가

조용히 채워진다.


윤호는 불을 끄지 않았다.


밝음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어둠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은

그대로 두었다.


꺼지지 않은 불처럼,
설명되지 않은 상태로.



비용은
즉시 청구되지 않는다.

대신, 자리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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