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개인사회> 33화
윤호는
전날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
사무실은
아직 완전히
깨어 있지 않았다.
불이 켜진 책상보다
꺼진 의자가
더 많았다.
어제의 소란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지만,
공기는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윤호는
가방을 내려놓고
컴퓨터를 켰다.
메일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추가 설명 가능할까요?”
“공식 입장은 어떻게 정리되나요?”
“인터뷰 요청드립니다.”
어제와 같은 말들.
다른 사람의 문장이지만,
결은 같았다.
윤호는
그 메일들을
읽지 않았다.
대신
새 문서를 열었다.
제목은 쓰지 않았다.
커서만
조용히 깜박였다.
손을
키보드 위에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오늘은
문장을 늘리지 않기로 했다.
어제는
말로 채웠다면,
오늘은
비워보기로 했다.
윤호는
회의실 예약을 취소했다.
아침 브리핑도
건너뛰었다.
동료 하나가
다가와
낮게 물었다.
“오늘은 뭐 하세요?”
윤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그냥… 일.”
설명하지 않는 말.
붙이지 않은 이유.
동료는
더 묻지 않았다.
윤호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시작했다.
데이터를 정리하고,
표를 맞추고,
숫자를 고쳤다.
말보다
느린 일들.
하지만
확실하게 남는 일들.
수정된 숫자는
조용히 자리를 잡았고,
정리된 표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날의 일은
크지 않았지만,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윤호는
로비를 지나쳤다.
스크린에는
어제의 제목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자극적인 단어들,
빠르게 붙여진 문장들.
윤호는
멈추지 않았다.
읽지 않았다.
고치려 하지도 않았다.
어제의 말은
어제의 자리로
남겨 두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윤호는
휴대폰을 꺼냈다.
녹음 앱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말은
이미 충분했다.
더 보태는 것은
정리가 아니라
되풀이일지도 몰랐다.
집에 들어서자
부엌 불이
켜져 있었다.
미라는
보이지 않았고,
서아의 방문은
열려 있었다.
집은
비어 있는 듯했지만,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았다.
윤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컵을 꺼냈다.
수도꼭지를 틀고
물을 따랐다.
작은 소리가
부엌을 채웠다.
서아가
방에서 나왔다.
두 사람은
마주치지 않은 채
같은 공간에 있었다.
“아빠.”
서아가
조용히 불렀다.
윤호는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아무 말 안 해도 돼.”
그 말은
부족함이 아니라
허락처럼 들렸다.
윤호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말보다
분명한 것이 있었다.
그날 밤,
윤호는
불을 하나만 켜지 않았다.
거실과
부엌의 불을
함께 켰다.
공간이
조금 더 이어졌고,
빛이
조금 더 퍼졌다.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집은
조금 더 밝아졌다.
조용한 선택 하나가
하루의 끝을
바꾸고 있었다.
말 이후의 선택은
언제나
생활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래서
윤호는
오늘도
말 대신
살아가는 방식을
조금씩
고쳐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