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 관심 없는 중학생의 특목고 이야기 (2)

리더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by 이고르

고등학생 때 전교 부회장, 대학교 1학년 1학기 때 학번 대표, 대학원(로스쿨) 1학년 때 학년 대표를 했고, 사적으로 어떤 공동체에서도 5~10명 이상의 모임을 주도하는 역할을 오래 해 온 만큼 좋은 리더란 어떤 리더인지에 대해 오래 고민해 왔다. 민주적 정당성 하에 소신을 가지고 공동체를 자신의 의견대로 이끌어가는 카리스마형 리더? 자신의 의견보다는 공동체 다수의 의견에 따라 사람들을 뒷받침하는 봉사형 리더? 개개의 사람마다 느끼는 바는 다르지만, 고등학생 때 경험한 아래의 활동을 통해 사람들을 공동체의 과제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웠다.


우리 외고에는 영어과, 중국어과, 독일어과, 프랑스어과, 일본어과, 러시아어과가 있었고 교육과정상 모든 과는 제2외국어를 영어만큼 공부해야 했다. 모든 학생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되면 대학교 그 언어 어문과의 졸업요건을 갖출 정도로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 언어에 일정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수능을 치기 위해 국어, 영어, 수학 하기도 바쁘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나는 학생들이 자기 전공 과의 언어만 익히고 졸업하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방과후 학교로 5개 외국어 학습반이 개설되어 신청하게 되었다.


이는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러시아어의 기초 수준을 익히는 학습반이었는데, 사실상 대학 진학에는 도움이 안 되다 보니 수요가 너무 적었고 잠깐 운영되다 폐지되게 되었다. 훌륭한 취지에 비해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것이 너무 아쉬웠고, 당시 나는 공식 동아리를 개설할 수 없는 시기의 1학년이었지만 자율의 형태로 5개 외국어 학습반을 동아리로 부활시켰다.


선생님을 구하는 것이 난제였지만, 2학년 선배가 1학년 후배들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이를테면, 러시아어과 2학년 선배가 중국어과 1학년 후배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것이다. 수시로 대학을 많이 가다 보니 대학 진학용으로 생활기록부에 적기에도 좋고, 외고라 실제로 외국어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많아 동아리 인원은 60명에 육박했다. 당시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동아리 중 최대 규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다음 과제는 교육과정을 짜는 것이었는데, 이게 매우 어려웠다. 먼저, '어느 정도'가 기초 수준이며, 그 기초 수준을 익히기 위한 순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도 아직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러시아어에 능숙하지 않다 보니 각 전공어당 한 명 이상이 운영진으로 참여하였으나 앞길이 막막했다. 설상가상으로, 동아리 회의를 할 때마다 동아리장인 나만 맨 앞에 나서서 주도적으로 발언하고 다른 운영진들은 그냥 앉아만 있다가 가는 현상이 반복되자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더 좋은 활동을 제공할지 고민이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행동이 좀 웃겼는데, 도서관에 가서 경영 관련 서적을 찾아봤다. 당시 내 눈에 들어온 책이 '멀티플라이어(그렉맥커운과 리즈와이즈먼)'였다. 책 홍보는 아니다.



책 내용을 대충 요약하자면 단체 사람들의 역량을 이끌어내는 리더가 있고, 단체 사람들의 역량을 오히려 저해하는 리더가 있는데, 요즘 시대에는 수평적 리더십 하에서 각 공동체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구조가 적합하며, 그 구조를 만드는 리더가 바로 사람들의 역량을 '곱하는(multiply)' 리더(multipliers)라는 것이다. 책에는 다양한 사례가 있었는데 지금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이걸 읽고 내가 뭘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난다.


당시 5개 외국어 학습반의 운영진 회의는 한 명(주로 동아리장인 나)이 앞에 나가 짜온 활동 계획을 설명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뒤에 앉아 내가 짜온 활동 계획에 대한 의견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이런 회의 방식이 바로 책에서 사람들의 역량을 저해하는 리더의 회의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고, '멀티플라이어'처럼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다.


첫째, 먼저 회의 장소를 바꾸어 모든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끔 원탁회의로 회의 방식을 변경했다.

둘째, 얼굴을 마주하고 돌아가면서 서로 자기를 소개하며 왜 우리가 이 동아리를 만들었고, 자신이 생각하는 우리의 과제를 직접 말한다.

째, 동아리장인 나는 논제별로 사람들이 의견을 이야기할 때까지 절대 발언하지 않는다.


이때 나는 놀라운 변화를 목격했는데, 지금까지 회의에서 절대 발언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다 가던 사람들이 마음속에 숨겨두고 있던 동아리 활동에 대한 열정을 쏟아내며, 서로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목격했다. 회의 시간이 이렇게 건설적일 수 있다니. 얼마나 감명 깊었던지 동아리 등록 기간에 동아리 이름을 'multipliers'로 등록했다. 아마 동아리 이름이 왜 이건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이 없었을 것이다.


그 이후 성과를 말하자면 애매하지만, 운영진 대다수는 열정을 가지고 회의에 임해주었고, 우리는 활동 계획을 짜서 5개 외국어 학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지금 확인해 보니 내가 동아리장이었던 2015 말~2016년 초 이후 2018년까지는 계속 동아리가 존재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마 자연스레 와해된 것 같다. 아무래도 대학 입학에 큰 도움은 되지 않다 보니 대학 입학을 위한 경쟁이 매우 치열한 곳에서 열정 있는 구심점이 없으면 존속하기 어려울 것 같긴 하다.


그때 이후로 내가 무의식적으로 리더의 역할에 대해 중요시하는 것이 있는데, 한 발짝 물러서서 사태를 관조하고, 사람들에게 문제를 던지되 대립하는 각 측의 의견만 들어 보고 먼저 해결하지는 않는 것이다. 물론 단체에서 내가 맡은 대표자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따라 역할이 달라질 수는 있다. 예컨대, 단체의 대표자 역할이 '정치'가 아니라 '행정'에 가까운 로스쿨 기수 대표의 경우 공동체 사람들과 문제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직접 행정실에 문제를 얘기하고 바로바로 해결하는 것이 필요한 면이 있다. 다만 근본적으로, AI가 고도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리더는 결국 자기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역량을 제대로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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