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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Aug 20. 2020

잃어버렸던 존재감 다시 제자리에.

사남매 엄마, 더이상 육아책을 읽지 않는 이유.

그곳을 찾아낸 시선이 아름답고, 그곳을 향해 가겠다고 나선 마음도 거룩하며

그곳을 향해 더디지만 한발 한발 가고 있는 새벽은 찬란했다.


혼자 아이넷을 키우기가 너무 힘들다 느낄때마다, 책에 매달렸다.

사실을 할 수 있는게 책 읽기 밖에 없었다. 만날 사람도 없었고, 만난다 한들 일반적이지 않은 나의 문제에 도움이 되는 말을 듣기는 어려웠다. 어느 정도 육아서를 읽고나니 저자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키우는게 너무 지리멸렬하고 내 일상이 이토록 힘들 때마다 늘 책에 기대고 그 때 마다 희망의 빛을 던져 주는 주옥같은 책들이 은인같고 늘 감사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더 이상 육아책에 손이 안간다. 왜지? 아이들이 그만큼 컷나?

어느 때 부터인가 육아에 관련한 책을 집어들고 목차를 훝어보면  무슨 얘기가 전개 될 지 가늠이 된다고 해야하나?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인거, 맞는거지?

여튼, 이제 육아책은 공통분모를 뽑아내서 유용하게 쓸만큼 다 쓰고나니 더 이상 수혈받을 게 없는 시장이 되어버렸다.


부모됨에 대한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들로 도움을 받아도 난 왜 이렇게 계속 어려운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일반적이지 않은게 여러모로의 어려움을 동반한다. 특별한게 좋은것이 아니구나. 평범한과 특이함의그 낙차만큼 오롯이 나의 몫이구나.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헤쳐나가는데 큰 에너지를 쓴 세월들이다. 사실, 육아의 고충은 일상을 모두 털어 희생해도 그 갭은 블랙홀 같았다. 메워도 메워도 더 빨려만 들어가는... 그리고 책에서 더 이상 찾지 못하는 내가 해결해야 할 특수성에 메달려 애쓰다 보니 알게된 사실.


 세상에 육아전문가는 없다. 세상에 같은 아이는 하나도 없듯
육아도 생산자가 전문가가 되어야만 길이 열린다는  증거를 책을 통해 하나하나 채택해 나갔다.
 증거들이 어느정도 모이자 사남매 홀로  키우는 노하우를 배울 현존하는 책은 없다는 사실 받아들였다.

이 길을 먼저 간 사람에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묻고 싶었는데 좁은 내 인간관계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아이키우는 엄마들 사이 커뮤니티에서 자발적이라는 허술한 가면을 쓴 채 타의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다. 나가달라고 굳이 하지 않았지만, 들어오라고도 굳이 권하지 않던. 하나둘의 아이로 딱딱 맞아떨어지는 그들만의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시스템. 그 언저리 어디쯤에 서서 우리 애들의 정신없음을 같이 아이 키우는 마음으로 눈감아 달라고 들이밀 뻔뻔함도 없다. 아쉬움을 완전 털고 미련없이 뒤를 돌수도 없었던 나는 오도가도 못한 채 아이 키우는 어려움에 외로움이란 감정까지 가중처벌을 받고 있었다.


아, 나는 이제 책도 없고, 맨토 선배도 없고, 엄마친구도 없네. 그럴수록 남편에게 더 매달리고,강연을 찾아다니고,할 것이 없다는 이유와, 원래 할 줄 아는게 이것 뿐이란 이유가 맞아 떨어져 책에 다시 매달리고 유튜브에 전국 명사들 강연에 의지했다.


그러다가. 알게 된 놀라운 사실. 빠빰~~~~

내가 찾아 헤매이던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는것. 아이가 넷이라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먼저 가본 사람은 없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내 몸이 알게되었다.  내 인생은 내 존재는 나라는 단하나의 육신에만 허락된 것이기에 내 두 다리로 한발 한발 걸어가면서 디뎌내야만 했던 나를 찾아가는 길이었다는 것. 이 깨달음이 나를 이젠 제법 평화로운 길로 안내해 주고 있다. 그랬다. 나는 실체가 없는 선구자를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 맨토는 나의 미래였고 지금부터 5년 더 살아낸 내 자신의 모습이 바로 내 선배였던 것이다.



책에서 읽은 것 내가 겪은 모든 것 다 이미 내 몸이 알고 있던 것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고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 인생 잘 사는 비법, 인생의 하우투는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식 하나로 먹고 살수 있고 돈을 벌어다 주면 인생을 잘 꾸려갈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과거엔 근육이 일하는 시대였다면 현재는 두뇌로 일하는 시대이고. 미래에는 가슴이 일하는 시대일 것을 현자들은 예고하고 있다.


가슴을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책에서는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영역이 되어버렸다.사람보다 더 잘하는 인물 AI가 등장하면서 인류가 설 곳은 가슴 밖에 남지 않기도 했다.가슴영역은 인간이란 생명체가 아니면 작동할 수 없는 분야이기 때문에 이제는 지식으로 얘기하는 사람의 말은 어느곳에서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하기 힘든 일을 몸을 던져 직접 경험한 사례를 들려주는 것 그것 이상의 설명은 군더더기이지 현학적인 잘난척에 불과하지 않기에, 기성 지식인들은 갈 곳을 잃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하우트에 내 몸을 던져 얼마큼을 내 호흡으로 겪어보았느냐 그를 통해 어떤 사유를 거쳐 내것을 만들어 놓았느냐, 이런 몸 경험이 사유를 뚫고 나온 그 깨달음의 총합이 각자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고. 명함이 다 드러낼 수 없는 진짜 자신이 아닐까?


내 몸을 결혼 생활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던져 몸을 던져, 어른 남자 타인과 아이 남녀 타인들과 하루 사이에도 수없이 벌어지는 사건과 감정에서 나를 온전히 잘 지켜내고 상대도 온전히 인정하는 연습을 무던히 해가는것, 4명의 아이를 각개의 소우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것. 그리고 이 많은 변수를 통제하고 감정을 다잡고 있는것. 그 안에서 삶을 읽어 내고 내 몸을 통해 해석한 것을 글로 써내려가고.. 하는 이 일상의 노력들 속에서 나는 계속 어디론가 가고있다.


그 어디를 가고 싶은지 내가 정해놓았지만, 내가 정해놓은것 같지 않기도 하고. 가고 있는듯 하지만 머물러 있는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 한 걸음이 전진하는 한 걸음인지 맞는 걸음인지 잘 모르겠다. 이 길 끝은 내가 지금 상상하는 것과 같을지 사실 어디일지 내 좁은 식견으로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오늘도 내 틀 안에서 안정감과 행복감의 밀도를 높여가고 있다. 전에는 어렴풋 했던 행복이 점점 짙어지면서 내 둘레를 안정적으로 휘감겨 머무는 느낌..


이게 나이들어감인가? 이래서 나이드는것이 행복한 거라고 하는건가?


어제는, 잃어버렸던 시계를 찾고 얼마나 기쁜지, 춤이 절로 나왔다. 춤 추는 나를 순간 알아채면서 와우. 정말 기쁘면 춤이 나오는구나 했다. 스토리가 잔뜩 묻어있어서 잃어버린게 자식 잃은것 마냥 마음이 아팠던 시계, 범인은 입었던 청바지 호주머니였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엄마를 보니 방금 혼나고 방금 싸웠던 아이들이 모두 뛰어와 엉겨붙어 함께 기뻐한다. 기쁨을 오롯이 내 마음처럼 느낄 수 있는 사이. 정말 친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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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제, 그제..새벽 4시반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머리를 쥐뜯고 있다. 글 시작의 한 문장 시작이 어려워 이것 저것 띄어놓은 글쓰는 모니터 창 주변을 깨작대면서 몇 시간째 성과없이 꾸역꾸역 앉아있다. 좀이 쑤신다. 일어나서 허리라도 펴고 싶은데 일어나는 순간 눈에 띠는 공간에 냅다 누워 버릴까봐 내 자신을 믿지 못해 차를 한잔 끓이러 일어나지도 못하고, 붙박이로 의자에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들.


그렇게 몇일 나의 존재와 독대하는 새벽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 어느 덧 잃어버린줄도 모르고 있었던 자아가 돌아와있다.

춤추는 요란함이 없고 몰려들어와 안겨들어 같이 축하해주는 이들도 없지만, 시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슴 충만한 행복감이 고요히 나를 휘감아준다.

이 평온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내가 40년 살면서 가장 진한 밀도 높은 감동이고 울림이다. 지난주를 신호탄으로 나타나주던 이 감정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봐 두려워 새벽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시 만난 이 평온, 이게 너무 감사하고 사랑스러워 잠깐 눈을 감고 느껴본다...


이 울림이 곧 일상속에 매몰될 감정이라 해도 이 농축된 에너지로 나는 오늘을 어제보다 더 감사하며 살아낼 수 있고. 그것만으로도 최고의 값진 시간들이다.

오늘의 새벽은 묵직한 평온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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