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새벽 길
나는 살아있다!
이 한 문장을 다시 한번 천천히 또박또박 힘주어 읽어보세요.
여러분들은 일상에서 살아있다는 감각, 자주 느끼고 사시나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의지로 “난 언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꺼야!” 하며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를 ‘던져진 존재’라 표현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라는 이름으로 살아 숨 쉬고 있고, 늘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그 생각이나 생각이 만들어 낸 습관으로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 다 공평하게 똑같이 ‘던져진 삶’을 수행해 가는데, 어떤 이의 삶은 자기만족이 가득 차 있고 내면에서 빛이 나며 타인에게 좋은 영향력을 한껏 발휘하는 반면 어떤 사람의 삶은 한탄과 후회와 다음 생을 기약하며 버티는 초라한 삶을 삽니다.
도대체 이 차이점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걸까요?
저는 오래전부터 이 사실이 궁금했습니다.
제가 던져진 세상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 녹녹치 않은 환경이었습니다. 자주 외롭고, 괴로웠지만 더 힘들었던 사실은 이 괴로움을 그 어떤 말로도 딱히 정의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 한정된 육신에 쌓이고 쌓였다가 글자라는 것을 배우게 되니 이 에너지가 내면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끄적임이라는 이름으로요.
틈만 나면 교과서 모퉁이에 터져 나오는 억울함을 썼어요. 학교에서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는 길 인적이 드문 곳에 아무 곳에 털썩 주저앉아 땅바닥에 손으로, 나무막대기로 초라했던 나를 받아주며 끄적였고, 그 수많은 끄적임이 일기가 되고, 자주 쓰던 버릇이 다행히 글짓기 대회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시골 촌뜨기라 놀림 받고 학교에도 집에도 마음 쉴 곳 없었던 작은 아이가 마침내 학교라는 사회에서 인정해 주는 작은 상을 받게 된 거예요. 그렇게 아이는 처음으로 존재감이라는 실제 하는 감각과 마주했어요. 그 당시엔 마냥 가슴이 벅차오르고, 기뻤다고 밖에 할 수 없었을 그 감정을 지금 더듬어 해석해 보면 ‘아, 내가 존재하는구나, 살아있구나’라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존재론적인 본연의 삶의 기쁨이었겠지요.
하지만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고 해요. 즉 일상의 쓴맛이 글쓰기의 찬란한 순간을 쉽게 덮습니다. 쓴다는 행위는 일상을 시간의 합으로만 가늠할 때는 아주 작은 시간일 뿐이니까요. 쓰는 시간보다 쓰지 않고 있는 시간이 인생에는 더 많죠. 자주 끄적이던 꼬마 역시 쓸 때는 잠시 살아있다가 쓰지 않는 그 많은 시간 들은 다시 ‘난, 사랑도 받지 못하는데, 왜 태어났지?’라는 자책으로 자주 이어졌습니다. 이 질문에 답은 사실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알 수 없겠죠. 하지만 명백한 것은 이런 질문이 세상과 우주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고 나이보다 세상을 거시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세상이 궁금할수록 바깥 세상이 아니라 자꾸 마음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때론 마음속에 너무 깊게 들어간 나머지 그 안에서 길을 잃어 세상과의 접속하는 방법을 자주 잃어버리곤 했어요. 이 방황은 꽤 오래 이어져 결국 준비되지 않은 어른이 됩니다. 마음은 깊은듯 하지만 사회적이지 못한 사람, 혹은 사회 속에 적당히 잘 섞여 있지만 나답지 않아 불편한 느낌. 이 두 갈래 길 가운데에서 꽤 오랜 시간 방황했습니다. 실패자, 낙오자, 살 의미가 없는 삶이라는 딱지를 스스로 붙이고 불안한 채로 결혼을 했고, 부모가 되었고 영글지 못한 중년이 되어 갈 때도 또다시 흔들리는 나를 잡아준 것 또한 글쓰기였습니다.
지금 누군가 “그래서 너는 잘살고 있냐?” 물으신다면, 전 움츠러들었던 과거를 딛고 당당하게 “네! 저는 참 잘살고 있습니다. 아니, 적어도 잘 사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제가 잘살고 있다는 확신은 완전하지 않지만 적어도 나다움에 대한 신념, 그 추상적인 신념을 현실로 만드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이기도 합니다. 이 신념으로 사는 삶은 겉으로는 알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내 내면으로부터만 진실하게 느껴지는 감각이니까요.
저에게 있어 이 신념의 출처는 확실합니다. 바로 지금 제가 하는 이 행동, 생각이라는 관념을 구체화하는 작업, 바로 글쓰기가 그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글은 여리고 어린 저를 살게 해 주었고, 저의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해주었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해 주었고, 네 명의 아이를 키울 힘을 주었습니다. 그 누구도 하지 못한 내면의 아이에게 위로를 전해주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반짝이는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가장 크게는 생명체라면 누구나 갈망하는 존재감, 이를 글쓰기로부터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니 이 깨달음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생각이 제 꿈이 되었고, 그 꿈이 나를 나답게 살도록 키워 주었네요. 어린 시절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교과서 모퉁이에 낙서를 끄적이던 아이가 글을 드라마작가를 꿈꾸는 소녀로, 신문에 글을 쓰는 사회인으로, 책을 쓰는 사람으로, 새벽을 깨워 함께 글 쓰자고 문 두드리는 사람으로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동시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창조물입니다. 즉 세상에 잘 섞이되 나만의 존재감을 놓치지 말아야 잘 산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잘 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이고 유의미한 행동은 ‘나만의 생각’을 키우는 일입니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규칙이 아닌 내가 나로부터 창조해 낸 생각들, 그것을 바탕으로 채워가는 일상이 나의 삶의 궤적이 되니까요. 이 궤적을 그리는 일은 글쓰기로 가능해집니다.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합니다. 안타깝지만 맞아요. 현실은 그렇습니다. 이 현실 속에 사는 저 또한 그렇습니다. 네 아이들과 넉넉지 않은 경제사정에도 매일 새벽 나를 깨워 나답게 사는 일은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 보니 삶의 의미는 있습니다. 저의 신념을 지키는 일이니까요. 또 함께 하는 벗들이 있으니 누군가의 신념을 지켜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행히 글쓰기 앞에 금수저, 흙수저는 없습니다. 비로소 제가 생각하는 공평한 세상, 우리만의 유토피아를 만들고 글벗들과 그곳으로 새벽마다 접속합니다. 이 글쓰기 유토피아에 다녀온 힘으로 세상을 살아내고 때론 현실이라는 비바람과 폭풍에 휘청거리는 자아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글벗들이 누구랄 것도 없이 먼저 다가와 젖은 몸을 닦아주고, 먼지도 툭툭 털어주고, 예쁘다고도 해주고, 잘하고 있다고 머리도 쓰다듬어 줍니다. 이 바쁜 세상, 손가락과 컴퓨터 나의 새벽 시간이면 그 모든 일들이 가능합니다. 세상이 힘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 손으로 세상을 창조하면 됩니다. 그럴 에너지가 흐르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세상 중 내 마음에 드는 곳에 접속하여 일원이 되면 됩니다.
지금도 여전히 쓰는 시간보다 쓰지 않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처럼 쓰지 않는 시간을 불안해 하지 않아요. 쓰지 않는 시간도 모두 글이 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거든요. 쓰는 시간엔 존재감을 세우고, 쓰지 않는 시간엔 새벽에 접속한 존재의 힘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신념, 저는 그것을 지키고 전파하는 일을 하려고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나만의 세상에 주인으로 살고 계신가요?
새벽 글로 만나는 유토피아는 함께할 글벗들의 동행을 언제나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