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키우고 있는 '나'라는 엄마 캐릭터
막내딸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왜 이렇게 커피있다고 하면 박수치고 좋아하고, 매일매일 커피를 마셔요?'
'좋아하니까 그렇지 ^^'
'그럼, 엄마 커피에 감염된거예요?'
'.....감.염...'
나는 그렇게 커피 '감염'자가 되었다.
아이는 '중독'이라는 뜻이 담긴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 중독을 대신할 말로 굳이 감염이라는 표현이 씌인 이유는 바이러스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라서일까? 잠시 씁쓸했다가 따라오는 생각은 저 쬐그만한 입으로는 그 어떤 단어를 말해도 왜 저렇게까지 귀여울수밖에 없는 걸까? 싶어 '감염'이라는 단어를 한참을 되뇌었고, 되뇌일때마다 또 웃었다.
'커피감염자, 나는야 커피감염자' 하루에도 몇번씩 마주치는 커피를 볼 때마다 생각이 난다. 그리고 피식, 웃음이 난다. 눈이 똥그래가지고 '엄마 감염된거예요??' 하던 그 목소리가 생각나서..
그 누가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 없다고 했던가. 맞다. 다 아픈건 맞는데 그렇다고 솔직히 열손가락이 똑같이 다 이쁜것도 아니다. 사실, 막내가 유독 이쁜것은 세상 불문율인걸까 싶도록 유난히 막내사랑은 유난스럽다.
다둥이 엄마끼리 모이면 세아이애기를 균등하게 할 것 같나? 절대 그렇지 않다. 착하고 책임감 많은 안쓰러운 첫째 얘기에 같이 숙연하다가 집안마다 사고치는것은 왜 둘째일까요? 하며 희안한 짓을 유난히 많이 하는 가운데 낀 아이들 이야기 보따리에 '아, 집집마다 셋넷중에 가운데 아이 상황은 다 비슷하구나' 안도와 위안을 내쉰다. 그리고는 곧 '우리집 애가 더 심해' 경연대회를 펼친다. 그 자랑스럽지 않은 1등 자리는 우리집 애가 자주 차지했다.
그렇게 총 10으로 할당된 아이들의 이야기중 2~3이 끝나고 나머지 7~8에 해당되는 '막내이쁜 이야기'가 시작되면 집집마다 웃음꽃이 활짝핀다. 그렇게 육아이야기는 기.승.전 막내이쁜 이야기로 훈훈하게 마무리를 지을 수가 있다.
우리집의 7살 난 막내는 아주 작다. 내년에 학교를 갈 아이라는 것이 몇번을 곱씹어도 믿기지 않는다. 아이를 보는 사람들은 100이면 99명은 5살, 많게 봐도 6살정도로 밖에 안 봐준다. 그 작은 체구에 귀여워야 마땅할 자리이지만 사실, 흔히 말하는 '넷째이고 막내딸'이라고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아이들 제보에 따르면 엄마가 없을때는 바로 위에 오빠 둘을 이겨먹기위해 '욕'을 남발하기도 하고, 언니오빠 셋과 1대3으로 싸워도 끝내 이겨내는 아이라 도저히 동생으로 예쁘게 봐줄 수가 없다는게 친족들의 생생한 증언이다.
재미있고 예쁜 말도 꽤 하지만, 그만큼 거친말도 많이 하고 지 뜻대로 안되면 그 작은 주먹질, 집나간다는 액션, 소리지르기, 엉엉울기, 못됐게 굴기 기술을 막 부려댄다. 나름 연연연생 오빠 언니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만의 방어기제를 갖춘 것이라고 애둘러 주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태생적 성향이다. 이 성향은 어디로부터 왔니? 하면 고개를 숙여야 하는 사람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그 사람인건 어쩔 수 없는 현실.
어제밤 잘 준비를 다 하고도 자기 침대에 가지 않고 엄마아빠 곁에서 뭉개길래 어서가라고 몇번 채근했더니 '아니,전 엄마 피곤한거 같아 마사지 해드릴라고 그러죠' 하고선 등을 몇번 꾹꾹 눌러주고선 이내 뒤집어서 눕는다. '아.. 힘들다' 근데요. 생각해보니까 저 욕 4가지 알고 있다요?' '아, 그래? 뭐뭐 아는지 얘기해주라' '아이참 얘기할 수 없어요. 안돼요 안돼.....음...뭐냐면..신발하고, C하고.. 아잉, 말 못해요.
(뭐야 다 해놓고...)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 아이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 한다. 막내를 떠올리고 이 아이를 위해 내가 죽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럴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흔쾌히 내 육신은 그러겠노라고 한다. 목숨, 그 까짓게 뭐라고.. 그런데 대신죽을만큼 사랑하면 그 아이때문에 힘들지도 않아야 할까?
은유작가님이 어딘가에 쓴 표현이었던것으로 기억한다. 육아를 한다는 것은 아이를 위해 죽을 수도 있지만 아이는 내 삶을 망치고 있다는 억울함 이 양가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아이를 통해 배울것은 참 많지만 그 중에서도 '인간 모순의 극치'를 가르치는 것이 아이들의 부모키우기 1번 능력인 듯하다.
그렇게 좋아서 낳아놓고 낳자마자 '너 땜에 못살겠다' 라고 외치는 인간의 생태적인 모순, 이것을 인정하고 인간은 어쩔수 없이 나약하며 자식앞에서도 자신이 힘듦을 먼저 밝혀내는 못난 어른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하는것.
세상 모든 엄마들에겐 아니겠지만, 나에게 딱 맞는 육아 정의다.
한 날은 집안에서 돌밥 돌밥 일상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는데, 뒤꽁무니에 막내가 붙어서 졸졸 따라다닌다.
처음에는 좋게 '엄마가 좋아?' 그렇구나... 해주다가 남루한 인내심은 금방 바닥이 나고, 아이 예쁨보다 '나의 일에 방해가 되고 있는 참을수 없는 존재감에 대한 화딱지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고만 따라다니고 가서 니 할일 하라구!!!' 아이는 천역덕스럽게 내 목을 감으며 '엄마 저 내 할일 하고 있는거예요. 엄마 졸졸 따라 다니는게 제 할일이랍니당~'. 그리고는 그 다음부터는 내가 뭐라 하건 말건 내 뒤를 더 바짝 쫒아다니면서 입으로 소리까지 낸다 '졸~~졸~~~ 엄마는 나의 할일.. 나는 지금 할일을 하고 있는거지용 '
그날 이후 몇일간은 나를 '엄마!' 라는 호칭대신 '내 할일!! 내 할일 어디갔~~~지' 하며 미저리처럼 나를 찾아다녔다. 나는 이 아이덕분에 지리멸렬한 현실육아판에서 하루에 몇번씩은 찐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많이 낳아놓고 제일 좋은건 '누군가에게 기대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열렬한 사랑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는 우월감이다. 사실 누구 좋으라고 낳은건 아니고 내가 원해서 낳아놓았는데 '무엇을 원했느냐?'를 가만히 깊이 들여다 보니 인기가 식지 않는 영원한 연애인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아이에게 엄마는 그 어떤 연애인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는 대상이다. 물론 아직 아이가 어려서 그럴수도 있고 크면 다르다고 하지만 그럴까봐 나는 경우의 수를 많이 두었다. 시절의 인연에 따라 들고날고는 있고 있고없고는 연속되겠지만 어떤 상황이든 넷 중에 하나둘은 계속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사랑한다 말해줄 것 같다. 그리고 아이들끼리 자체경쟁을 하다보니, 다른 집보다 유독 엄마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지네 세상에서 엄마는 참 쉽게 곁을 내 주지 않는 희소성이 있는 사람이고 내 입장에서는 아이는 세상에 하나뿐이기도 하지만 '여럿중에 하나'인 존재니 더 여여하게 대할 수가 있다.
그저께 셋째에게 뽀뽀를 요청했다가 칼캍이 거절당하고 마음이 쓰라렸다. 하지만 이내 금방 복구하면서 당당하게 외쳤다. "내 언젠가 이럴줄 알았다. 아들이 너 하난줄 아냐? 큰 아들!!!" 그러면 아이는 '아, 내가 이렇게 뻗대다가는 엄마의 관심밖에 나겠구나' 하는 본능에 따라 다시 내 품을 금방 찾는다. 그리고 아무리 잘난 연애인도 인기는 한때이고, 그 인기는 일상까지 침투하지는 못한다. 일상과 인기가 하나되는 삶. 바로 엄마연애인의 삶이다.
물론 팬관리가 쉽지는 않다. 다른 연애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의 모든 뒤치닥거리라는 엄중한 할일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어쨌든 해내야 하는 일이라면 적어도 나에게 맞는 엄마상이 무엇인지는 알고 최대한 즐겁게 이 과업을 해 내고 싶었고 엄마의 존재는 '항상 그 자리에 있어주는 나의 삶의 뿌리'이런 고전적인 엄마라는 옷은 나에게 잘 맞지를 않았다.
엄마라는 영원불멸한 고정적인 위치도 사실, 개인의 성향에 맞추어 재해석 해야 된다는게 천성부터 이기적인 이 엄마의 생각이다. 나는 나에게 맞는 옷을 찾아냈다. '셀럽 엄마' '해주는게 늘 당연하지는 않는 엄마' '녹녹하지는 않지만 친구같이 웃긴 엄마' '인생에 꿈을 찾는 동기부여가 엄마' '밥해주는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없는 엄마' '친한것과 예의는 엄중히 구별해야 천벌을 안받을 수 있는 엄마'
나는 나에게 맞는 엄마라는 옷을 계속 바꿔입고 있다. 그리고 '연애인'이 되려면 1대1이나 2대1관계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대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개수를 세상에 내 놓기 위해 그 어떤 고통보다 큰 고생을 감내해서 얻은 내 자리, 힘들게 온 이 자리에 서서 나는 숨김없이 '나라는 엄마 캐릭터'를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세상 엄마들에게 말하고 싶다. '책에 나오는 엄마 모습이 내가 아니라고 죄절하거나 힘들 필요없다.
내가 잘하는 엄마 모습으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 엄마'의 모습이면 된다. 대신 그것이 노력하기 싫은 마음을 씌워 게으름을 핑계삼을 허울만 아니라고 하면, 세상 모든 엄마는 멋지고, 위대하고, 대단하고, 큰 박수 받을 자격이 백번, 천번, 만번 있다고. 엄마자격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신과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이들만이 줄 수 있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