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제가 애들 이야기가 듣기 불편하다. 하지 말아 달라 하면 형수는 어떨 것 같아요?"
"음.... 도련님이 불편하시면 선을 그으실 필요가 있죠. 이 나이에 불편한 얘기 감수해가며 유지해야 할 관계가 아니래도그렇고, 중요한 관계라면 더더욱이요.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으로 서로 불편한 상황은 방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집 도련님의 조카들을 말하는 거라면 이야기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사 남매는 우리 아이들인 동시에 태어나자마자 도련님의 가족이기도 하니까요. 애들 얘기 듣고 싶지 않다고 선언한다면 우리와도 가족이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이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희가 있는 애를 일부러 숨겨가며 얘기를 안 할 도리가 있는것도 아니니까요"
남편의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지만 첫 만남부터 서로 범상치 않았던 삼촌은 그사이 몇 차례 여자 친구 소개 끝에 결혼까지 골인. 그 과정에서 우린 크고 작은 우정과 추억과 히스토리를 쌓았다. 10년이 뭐길래 10년 지나고 달라진 것들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큰 소용돌이를 한번 지나오니 우리 이제 제법 친해졌나 보다. 겉도는 얘기 아닌 진짜 속 얘기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을 정도 그만큼은. 나는 "왜 그렇게까지"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나도 왠지 모르게 시동생을 챙겼다. 크게 형제'애'가 없고 가족에게 의외로 잔정이 없는 남편에게 하나뿐인 동생을 챙겨야만 하는 이유를 자주 떠들어댔다.
내 것만으로도 꽤 복잡 다난한 인생이라 그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동생을 직원으로 채용함으로써 함께 일하는 가족,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고리에 동생 손을 잡고 걸어두었다. 미국 신혼시절 서로 뭣도 모를 때 눈치 없이 미국까지 가서 미안했다는 얘기를 안주 삼아한다.그리고 이제는 여수에 내려올 때마다 도련님이 상경할 때마다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낸다. 둘이 나란히 미팅을 다녀오고, 일이 없는 낮에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서 저녁엔 술잔을 기울이며 옛이야기에 질질 짜는 최 씨 형제들의 안주로배를 불린 다음 그들을 태워 집에 데려다주는 '장미 대리'역할. 거기까지가 내 몫이다.
만남의 시작점부터 우리 부부와 각별했던 동서 부부는 적당한 나이에 마땅한 이유로 아이를 원했다. 그리고 그 시절 이미 다둥이계에 입문했던 나는 코드가 맞아 같이 놀면 재밌는 동서와 함께 아이를 키우며 도란도란 두 가정이 화목하게 지낼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그 꿈을 꾸는 1~2년은 서로에게 안식이었다. 우린 동서라는 이름을 벗고 자매처럼 자주 통화를 했고 워낙 주위를 살뜰히 잘 챙기는 부산 작은엄마는 우리 아이들에게 큰 평판을 얻었으며 곧 있을 사촌동생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두 가정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무르익어가던 중.
내가 내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이 빠지고, '잘 있겠지..'라고 접어두었던 그 일상 사이사이에서 크고 많은 일이 벌어졌다. 슬슬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부부의 사이는 급격히 나빠졌다. 집안의 불화, 사업, 이사, 건강상의 이슈, 그밖에 이런저런 그런 변수에 삶의 주파수를 맞추다 지치고 닳아 아이 갖기에 대한 희망 그래프를 거의 꺾어버린 시점까지 도달했다. 나는 동서의 손을 잡고 절에 가서 절절한 마음으로 기도도 올렸고, 고향 가는 남편 편에 알토란 같이 모은 금일봉을 전해 시험관 하는데 슬쩍 보태기도 해보고, 서울에 서 시험관을 진행할 수 있게 세팅해둘 테니 함께 방안을 연구해보자고도 했다. 두 형제 부부는 그렇게 각자의 위치에서 또 서로를 향한 노력 에너지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은 언제나 그렇듯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
너네가 그러고도 잘 지내는지 한번 지켜보겠다는 심산처럼.
결론적으로 우리는 운명에 맞서 잘 살고 있다. 동서 부부가 아이 생기기를 원하는 마음이 절실할쯤 운명의 장난처럼 나에게 넷째가 찾아왔다. 임신소식을 접하자마자 부산에 있는 동서를 떠올렸다. 잠시 내가 그녀를 배려하는 최선의 행동은 무엇일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나의 잘못도 너의 잘못도 아닌 그저 생명일 뿐'인 상황을 잘 정리할까. 마음을 정돈하고 표현을 가다듬는 사이 다른 경로로 이 소식을 먼저 듣고 그녀는 나에게 전화를 했다. "형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님의 임신소식에 그것도 넷째 소식에 제가 마음이 상할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그게 되려 너무너무 서운한데요. 진짜 진짜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했다. 나는 그 말속에 진위를 해석하려는 노력 대신 들은말, 전해지는 마음을 믿었다. 그것이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이름을 고민하는 나에게 '형님 '슬'자 어때요? 제가 나중에 아이생기면 쓰고 싶었던 글자이기도 한데, 예쁜 것 같아서... 괜찮으시면.. "그래..? 진짜 괜찮겠어? 아, 너무 좋다. 난 왜 슬자를 생각 못했지?" 못 이기는 첫 넙죽 받았다.
직감적으로 이 아이가 그 집 아이의 리드오프 역할을 해 줄 것만 같았고 이렇게 이름을 주고 나서 막상 금방 임신이 되는 상상을 했다. "그때 슬아 이름을 드리고 나니 떠오르는 게 없네요" 동서가 말하면, 아니 안 말하겠지만 난 최고 비싸고 유명한 작명소에 가서 받아온 세상 최고의 조카 이름을 서울 큰 엄마표로 가져다 줄 즐거운 상상을 하며기쁘게 이름을 받았다. 그렇게 막내는 작은엄마가 준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왔고 호적의 가장 밑동에 최. 슬. 아.세 글자가 가지런히 자리 잡았다.
"형, 애 하나 내줘라. 형아는 그래도 세 개나 남잖아.."
하루는 두 형제가 소주잔을 기울이다 말고 아이 얘기를 하던 도련님이 소울음 같은 눈물 끝에 이렇게 얘기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을 훔치면서 순간 방금 떠올린 생각을 잡아다가 진지하게 생각의 굴을 파고 들어가 앉았다. 막내가 돌 때쯤 되기 전인 지금. 사건을 저지르려면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도련님의 마음이야 그렇다 치고 동서의 마음도 중요했지만, 그 이전에 내 진심이 어떤 지부터 들여다봐야 했다. 그냥 딱 봐서는 넷 중에 하나인 아이일 뿐이지만, 마치 막내를 낳기 위해 셋을 출산한 듯이 그렇게 막내가 딸이라는 사실이 내가 태어난 것보다 기뻤던 나. 하지만딴 아이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같고 막내가그나마 타진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러려고 동서가 슬아 이름을 지어주었나? 는 생각에 이어, 내 스스로에게 "정말 보낼 수 있어?"라고 먼저 물었다. 그리고 진지하고 어이없게도 '그렇다'는 내 안에 대답을 들었다. 내 자신이 제일 깜짝 놀랐다. 남편에게 물으니 "정신나간소리 하지 말라" 한다. 둘이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삼남매를 둘러 앉혀놓고 다다미방 조용한 일식집을 예약까지 해 가족회의를 열었다. 내 몸을 빌어 태어났지만 태생부터 이 아이들에게도 언니, 큰오빠, 작은오빠 자리를 만들어준 엄연한 핏줄이니 권한을 주어야 한다 생각했다. 첫째, 셋째는 "엄마 절대 안돼요" 한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잠자코 있던 큰 아들은 가만히 생각하던 입을 열어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어머님이 정 원하시는 일이시라면.... " (이게 우리 캐릭터를 알고 말로 풀면 코믹 버전인데 글로는 진지해져 버려서 당황스럽다)
다수결의 원칙, 민주주의를 대척해 더 밀고 나갈 방법이 없어 포기했지만 그 당시의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내 몸으로 태어났지만 사랑받을 곳에 또 아빠의 핏줄인 그곳에 가서 잘 커줘도 상관없을 것 같았고. 나는 엄마대신 큰엄마가 되어 잘 크는 아이를 흐믓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라는 자리를 줄 수 있다는 것은 무겁게 말하면 신의영역같지만 사랑하는 동생들에게 이로서 크나큰 삶의 기쁨을 선물해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감수 하고 싶기도 했던 내 진심이었다. 아직도 동서는 이런 생각을 내가 했다는 것 자체도 모를 수도 있게 정신없던 그 세월도 몇년이 지나왔다.
어제 질질짜는 최씨 형제의 술자리에 2차까지 따라갔다가 호텔로 돌아오면서 부산에 전화를 했다. "여수 밤바다 바람이 좋아서, 생각나서 전화했어" "형님, 취하셨어요? 커피랑 사이다를 얼마나 과음하신거예요?" "아효... 남자들 우는거 꼴뵈기 싫어서..." "우리 남편 울어요? 아 요새 왜 더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자기가 없으니까 내가 혼자 그 꼴을 다 봐야 하잖아....빨리 와" 어쩌구 저쩌구...
수화기를 잡고 깔깔거리며 로비로 들어가는 내 뒷모습을 멀리서 내가 지켜본다. 제발 이 가정에 아이하나만, 많이도 아니고 하나만이라도 내려주세요. 제발요. 라고 소원노트에 빌고 내가 믿던 부처님께 108배를 올리던 정성의 시절이 내 등뒤로 한차례 훅 지나간다.
사실, 다둥이 엄마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치봐야 할 것도 많아진 세상이다. 내가 건강하게 아이를 잘 낳은 후일담도 자리를 봐가면서 해야하는 예기치 않게 눈치없고 개념없는 히스토리가 되는 일도 솔찮다. 브런치에서 책에서 난임의 글을 접할 때마다 문득, 임신을 위한 노력이야기를 전해 들을때마다 덜컹. 나의 잘못은 아니지만 가시방석처럼 몸과 마음이 불편하다. 그냥 하는 내 말이 그냥 쓴 내 일상글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거나 '그래서 뭐 어쩌라구, 애많은게 자랑이냐. 니 잘났다'라는 피드백을 달고 나올 글이 될까봐. 겁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안에서 수그리고 있다보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내 삶이 된 아이들이고 이 아이들을 얻기까지도 또 당장 오늘 하루도 살아내는 내 인생도 녹록치 않은데, 이것을 타인의 눈치까지 보면서 살아야 한다면 내 삶에 대한 성의가 아니라 생각이 든다. 내가 가장 멈칫하는 구간 난임과 불임에 관한 이야기에 진정한 겸양으로 승화시킬 유일한 방법은 세상에 태어난 이 아이들을 잘 키워 가족 모두가 사회에 보탬이 되는 좋은 일 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우리 애들이 자식처럼 살뜰하게 작은아빠엄마를 챙기는 조카자식으로 키우는 것. 아이가 있는 가정과 없는 가정도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서로 배워가고 포기하지 않는 것. 이정도 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
나는 사실 "가족이니까"로 모든 것을 해결짓는 사람측에 속하지 않는다. 아빠니까 대신 "아무리 아빠라도"가 더 자주 내 입에 붙어있고 "가족도 인간관계의 한 단면일 뿐이니, 갉아먹기만 하는 관계는 정리하는 편이 낫다" 주의다. 친정에서도 가족끼리 더 예의를 갖춰야 하고, 아닌건 아닌거라고 말하는 사이가 되야한다고 딱딱하게 주장하는 작은 딸이다. 적어도 우리 친정식구에게서는 '도통 가족챙길줄 모르고 지 몸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내가 부산 가족을 만나면 대화합을 장을 열려고 무척이나 애를 쓴다.
큰 며느리라는 자리값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아니다. 이유를 굳이 찾자면 글을 쓰고 나서야 더 명확하게 보게 된 남편 가족 서사때문일텐데, 사연많은 부모님은 그렇다치고 도련님네 가족 하나 만큼은 우리부부가 살뜰하게 챙겨야 할 대상이라 여겨진다. 우리 가정이 나의 오빠언니네의 챙김을 받고 삶을 다시 열심히 살아가는 충전에너지를 얻듯, 우리는 남양주에서 받은 감사를 부산, 여수에 베풀려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 인간사인가 하며 말이다.
아이를 원했지만 생기지 않는 집이나, 아이에 대한 별 생각이 없었는데 넷을 떠안고 사는 집이나.
운명은 원하는 대로 짜있지 않다. 큰 운명의 틀 속에서 무엇을 해석하고 어떻게 잘 살지를 정하는 것 그게 우리네가 할 수 있는 작은 선택이고 이 작은 선택들의 합이 인생을 어디론가 계속 데려갈 뿐이다.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이시간,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내 앞에 있는 사람뿐이다. 우리 여섯 가족이 셋셋 나누어 따로따로 하루씩을 보냈다. 그제는 남자애 둘이 삼촌네서 잤고, 오늘은 여자조카둘이다. 형은 물론 붙박이고. "나 애들 다 데리고 못 자요'라고 말하면서 떠넘기듯 했지만, 6명도 늘 자던방에 못재울리는 없다. 낯선 타지에서 아는 이 없이 거의 모든 시간을 혼자 밥먹고 혼자 보냈을 삼촌에게 보내는 이틀밤의 북적거림과 선물이다. 이 삼촌, 얼마나 아이를 좋아하고, 정이 많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인지 내가 잘 알기 때문이다.
형네가 북적거리고 떠난 후에 남겨질 외로움이 걱정되 아이들을 똘똘말아 노출을 최대한 피하려 노력했던 때도 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외로움쯤 그의 아내를 만나 잘 해결해갈 수 있을 만큼은 단단해졌다고 믿는다.
나를 삼촌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또 하나의 큰 이유가 있다. 날 가장 많이 울게도 가장 많이 흐믓하게도 하는 우리집 둘째는 마치 삼촌이 입으로 뱉어놓은 것처럼 모든 것이 삼촌과 빼박이다. 외모부터 성격, 음식취향.지구최고의 다정함과 뚜껑열리게하는 성향을 동시에 구사하는 능력까지 모두 쏙 빼닮았다. 혹시, 그 부부가 아들를 낳으면 내 남편을 쏙 닮은 조카가 아니었을까. 이제는 포기 했다는, 이 생에 오지 않을 조카가 너무나 애달픈 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