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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Jul 15. 2021

우주 라이크 커피?

나의 마음에 필요한건, 카르만라인.

"엄마, 왜 무덤에다가 술을 뿌려요?"

"죽은 사람에게 '저 왔어요. 술한잔 하세요' 라고 하면서 위해 드릴 려고,

그러고 보니 왜 꼭 '술'인지는 엄마도 모르겠네. 물도 뿌리고 과일이나 떡 같은것도 올리기도 하잖아.

그냥 조상님들이 좋아해서 아닐까?"

"아, 조상님들이 좋아했던 것을 올리는 건가보다.

그럼, 엄마 무덤에 갈때나 엄마 제사 지낼 말고 커피 뿌려드릴께요."



외출끝에 네 아이와 저녁이 애매하다. 집앞 김밥 집에 나를 내려달라고 하고, 내가 김밥집에 들어가 주문하는 사이 그는 적당히 차 세울곳을 찾아서 기다리는 것, 자주 있는 우리집 일상모습이다.

"여보 어디?" "카페카페 앞이예요" 요 앞에도 차 세울때 있는데 오늘 왜 거기까지 갔지?

차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이 안에서 열리면서 네 명의 아이가 시끌벅적 소리를 지른다.

"짜잔! 엄마 커피예요!! 커피~~좋죠? 마셔보세요. 맛있어요? 어때요. 내가 샀어요. 용돈 모았어요"

왁자지껄한 차에 오르면서 물었다. "나 아까도 마셨는데..? 왜" "아니, 애들이 아빠 엄마 커피 챙겨주냐, 사줘라 난리난리. 돈없다니까 그럼 지네가 사겠다고 난리. 여기커피 좋아한다며.  자기는 평생 커피걱정은 다 했네...."

"아, 애들아 고마워~ 근데 엄마손에는 뭐가 있게?"

"뭔데요. 김밥이잖아요. 김밥말고도 있지~~요. 짜잔!!"

"와~~~ 아이스크림이다~~!!"


그 어떤 사전대화가 없었음에 내 손가락을 건다.

최씨일가에게는 엄마가 좋아하는 커피가, 엄마의 손에는 그들이 원하는 아이스크림이 들려있었다.

모파상의 목걸이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일상의 감동이 이렇게 작은 순간에 있다. 그날 따라 그집 커피는종합순위 1위를 주어도 무방할 만큼 유난히 맛있었다.



우주를 향한 엘론머스크의 도전기를 뉴스로 접할 때마다 배속 깊은 곳이 꿈틀꿈틀 반응을 한다.

뭔가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도 있다는 기대일까? 별을 생각하면 가슴끝이 떨려오고, 남편이 가끔 별 이야기 해주면 초롱초롱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인다 최근에 예쁜데 멋지기까지한 박사님이 쓰신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난 다시 태어나면 별보는 사람이 될꺼야' 라고 남편에게 선언했다. 지구 밖 세상이 아주 어린시절부터 늘 막연하게 궁금하던 나. 어제 본 신문 칼럼에서 어디서부터 우주인가를 정하는 기준점 '카르만 라인'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헝가리의 물리학자 시어도어 폰 카르만의 이름은 땄다는 이 라인. 이것이 하는 일은,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에 선을 쭉 긋고 여기까지는 하늘, 여기서부터는 우주.  이렇게 하늘을 둘로 나누는 것이라 한다.


보이지 않는 선을 만드는 일이 지구과학자가 하는 일이라면, 우리가 해야 하는 일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부부라인을 잘 긋고 '적정거리'를 찾는 일이 아닐까?


목소리가 맹맹한것이 심상치가 않다. 여태는 별일 없이 이웃들의 소식으로만 건내듯 들었던 '코로나 소식'이 어쩌면 이번엔 비켜갈 수 없는 우리것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안그래도 네 아이의 '동시다발줌'이라는 유례없는 역사의 현장과 앞으로 이어질 기나긴 방학생활에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게 버거운데, 이 와중에 남편의 아픔? 두가지 생각이 동시에 든다.

아, 이 사람의 몫만큼 나의 일? 내가 더 해도 좋으니 아프지만 말지.

밀착접촉자라는 고지나 검사요망 연락을 받은적 없지만, 더해지는 감기기운에 병원이 아닌 선별검사소를 제발로 찾아 나서는 그에게 '잘 다녀와. 연락주고요.' 하며 그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곧,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켜 그의 뒤를 따라 뛰었다. 뛰면서 그제야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내 차림, 목 아래로만 보면 초등4학년 여자아이다. 딸이 벗어놓은 티셔츠를 급하게 걸쳐입고 발에도 딸아이의 신발이 꿰어져있다. 모습은 우습지만 마음은 혼자 죽게 버려둘 수 없다며 비장했다. 집안에 남겨진 네 아이는 전화가 빗발친다. "갑자기 말도 안하고 어딜갔나요..."



이 남편 내심 반가워하는 것 나 다 아는데, 난 이제 보이는데 10년을 넘게 데리고 살아도 여전히 좋다는 표현에 인색한 경상도의 아들인 그다. 선별소 앞의 풍경은 덥고 나른했다. 벌써부터 줄을 서서 이렇게 1시간전부터 기다려야 하는구나. 뉴스에서 신문에서만 본 현장에 이렇게 남편덕에 와보게 되는구나. 그의 옆에 서 있고 싶은데, 직원분들이 자꾸 자기 라인을 지키란다. 그래서 한참 떨던 수다를 거두고 '나의 라인'으로 옮겨갔다. 그제야 맑은 하늘이 눈이 들어오고 주위도 그곳에 선 사람들도 선명하게 보인다. 아빠손을 잡고 온 우리 셋째만한 아이까지 눈에 들자 문득 아까 읽다가 온 칼럼내용과 내가 보고 있는 이 하늘이 겹친다.


사람의 마음도 이 우주의 공간같은 것이 아닐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 없는 '느껴지는' 그 마음들. 우리가 오늘 우리몸에 들어와 있는지 알아내려고 온 이 코로나 바이러스도 혹여나 그런것은 아닐런지. 드러남을 통해 무언가 전하려고 하는 메세지가 있는것같다.

그냥 '환경을 지켜야 해요' '후손들에게 맑은 지구를 물려줍시다' 라는 구호만으로 변할 사람들이 아님을 알기에, 우리에겐 '재앙'으로 표현되는 그 바이러스가 메세지를 전하러 온거라고. 지구가 지속가능할 행성일지 아닐지는 지금 너희들의 손에 달렸어! 라고.




우주와도 같은 사람의 마음이라 한다. 펼치면 어디까지가 끝인지 모를 원대함을 품은 사람의 마음. 이 마음은 내 작은 육신에 갇혀 그 뜻을 품은대로 펼치고 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마음은 다른 마음과 만나지면 무대가 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고 인정받고 또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의 밭.

사람이 사람 잘 겹쳐어우러지기 위해서는 어디까지가 내 마음이고 어디서부터 니마음인지에 대한 규정이 필요하다. 이 광대한 하늘에 어디까지가 그냥 하늘이고 어디서부터가 우주인지 카르만의 라인이 있는 것처럼 내 마음에도 적정라인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공간 어디쯤에서 머물고 있을 때 난 가장 편안한 사람인지, 쉬어갈 마음을 찾을 수 있고 그 마음에서 충분히 쉬어간 내가 세상을 향해 또 뻗침을 이어갈 수 있다.


갑자기 훅 갖다 붙이는 것 같지만 이 마음의 경계라인이 있어야, 부부사이도 좋아진다. 내가 여기까지는 내 영역이고, 내 소명이고 내 구역임이 소중함을 깨우쳐야만 상대의 것도 소중한 무언가 있을텐데..라는 관점에서 그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부부의 불화의 원인은 이 영역의 모호함에서 쌓이는 불만이 아닐까?.

전형적으로 집에 있는 아내는 '하루종인 내가 당신을 기다렸는데 어찌 이렇게 퇴근하고 당신은 당신만 생각하느냐' 고 날을 세우고 사회생활에 지쳐돌아온 남편은 '내가 나혼자 좋자고 그렇게 일하고, 눈치보고, 전전긍긍하는 것도 아닌데 집이 아니면 어디서 쉬고, 어디서 내마음대로 하느냐'고 맞선 날을 세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둘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둘다 안타깝다. 그런데 둘 중 하나는 그 의미없는 날선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선언을 해야한다.


그 평화선언이 바로 내 마음에 카르만 라인 세우기다. 내 안에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는것이다. 내가 아무리 남편에게 놀아달라. 나를 알아달라 외쳐도 내 마음밭이 가시밭이고 복잡할 때 그곳에 와서 놀아줄 남편은 없다. 내 자식도 거기에 와서 놀지는 않는다. 편안하고 예쁜 다른 꽃밭을 찾아 나선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나조차 내 마음에 머물러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놀 수 있는, 놀고 싶은 내 마음밭을 잘 가꾸는 것. 모두를 위해 이것이 필요하다. 내가 내 밭을 가꾸는거 소위말하는 '나 찾기'인데 이건 생각에 따라 참 어렵기도 하고. 어렵지 않기도 하다. 중요한 비법은 진짜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느끼고 솔직하게 대응하는 것. 이것이 마음텃밭의 기초토양공사의 지름길이란 사실.



나의 내면은 항상 '커피 향기'에 반응했다. 길을 가다가도 커피향이 나면 문득 어둡던 마음이 환하게 불이 들어오던 이 기분이 여러번 반복되는 현상을 외면하지 않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건 우연이 아니라 '나의 고유한 성향'이 이미 되버린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두아이를 데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바닥부터 시작해야 했을 때, 부모 눈치보면서 월세방을 얻는 숨막히는 현장을 벗어났을때도 커피 한잔만이 뜨겁게 나를 위로해주었고 나의 오랜 일상을 붙들고 있었던 육아 불지옥에서도 사이사이 겨우 마시는 커피만이 나에게 현실적인 구제책이 되어주었다. 네 아이를 임신하는 동안 유일하게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남편과의 산부인과 동반출석 100%의 기록과 커피마시기였다.

난 언제나 마음이 좀 불편해지면 까페를 갔다. 지금이야 작업실도 마련했고 집에서도 글을 쓸 수 있지만 내가 무슨 사람일지 모르는 나를 데리고 살때는 그녀를 무작정 까페에 자주 갔었다. 가서 손에 잡혀서 들고온 아무 책이나 아무페이지를 막 읽고 커피도 막 부어라 마셔라한다. 그렇게 연거푸 2잔정도 하면 속은 쓰린데 희안한 마음의 평안이 온다. 그것만큼 내 일상을 크게 반향하게 하는 일이 없구나를 판단한 후 나는 그럼 까페에 앉아서 일을 해도 되는 것을 직업삼으면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어수룩한 글들이 쌓이고, 바리바리싸들고 간 짐속에 쌓인 책 한권의 한 구절도 읽지 못하고 다이어리만 펼쳐놓고 2~3기간 멍때리다 온날들이 쌓이고, 세상 최고 급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것처럼 아이들 넷을 다 등원시켜놓고 유치원 앞 까페에 앉아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책만 읽던 날들, 어깨빠지게 가져간 책들을  휴대폰만 들여다 보다가 가방채로 그대로 들고오면던 나는 마침내 '글쓰는 사람'을 직업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그곳까지 왔다.




나에게 이 곳은 세상 최고의 안식처이다. 이제 까페에 집착하지 않는다. 내가 나를 글쓰는 사람이라고 당당히 밝힐 수 있는 그 지점에 왔기에 세상 어디에 있어도 나는 나로부터 안정적이다. 오늘도 역시 새벽에 일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매일 새벽 나의 가장 힘점은 몸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자각한 그 순간이다. 그 순간엔 그 어떤 사명이나 목적도 나를 일으켜주지 못한다. 유일하게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곧 마실수 있는 커피한잔에 대한 기대감 뿐이다. 마침 오늘은 어제 장을 보면서 남편이 사다놓은 산미거의 없고 바디감이 묵직하고 고고한 맛이 일품이라고 '써 있는' 새 원두가 있다. 그것을 프레스기기에 꼭꼭 눌러 버튼을 누르고 나면 틱, 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향이 내 코에 스며든다. 그렇게 커피잔을 받쳐들고 '오늘도 써 볼까?' 하는 순간 비로소 나는 나의 소중한 안전지대에서 내 꿈을 향해 달릴 준비를 멋지게 할 수 있다.


스텔라가 사는 나라는 우주는 커피를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유얼 우주 라이크 커피?? 예스!!

글 한편 다 썼으니, 커피 한잔을 더 마셔야겠다. 이제부터 네 아이 단체줌이라는 어려운 과업에 돌입해야하니까. 이번엔 아이스로. 샷추가는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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