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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Jul 14. 2021

100일의 '기절'과 '기적'.

곰이사람 되는시간, 모두의 꿈에 씨앗을 심는 시간

"너 요즘 무슨 일 하니? 회사 옮겼다는 얘기 들은 것 같은데.."

"아 선배 저 대한 조계종 협회에서 홍보 일해요..."

"어, 그래? 나 한때 거기 직원 중에 OO대리인가? 알아?"

"네네. 선배가 그 대리를 어떻게 알아요?"

"나 그이랑 자주 통화했는데, 텍사스에 있을 때 포교사 자격증을 땄거든. 

최초로 해외 온라인 과정을 취득자라 새로 세팅해야 될게 많다더라면서 자주 메일 주고받고 070 전화로 통화하고 그랬었어"

"아... 흐.....   그 유명인이 선배셨구나. 회사 안에 소문이 자자했어요. 최초 해외 자격증 회원인 것도 그렇고, 더 말이 많았던 건 임산부인데 비행기 타고 날아와 직지사 포교사 응시 수련회에도 다 참가하고, 그 추운 날 새벽 밖에서 3보 1배까지 누락 하나 없이 수련회 프로그램을 끝까지 다 하더라...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대단하더라... 

이렇게 우리 회사 전설처럼 남겨졌는데, 그 레전드가 누나였구나...

근데, 진짜 무슨 사연이에요??"




첫 딸을 낳고 나서 둘째를 가진 시점에 나는 포교사 자격증을 땄다. 

사실 미국에서 한인들이 살아갈 방법으로 가장 보편화된 것이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을 내 가슴으로 믿느냐 안 믿느냐를 떠나 나 혹은  가족이 무사히 이 낯선 땅에 잘 정착하느냐 못하느냐에 생활형 니즈로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는 한 응당 택해야 하는 정해진 수순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에는 아무리 나 자신을 설득해도, 그 어떤 이유를 대면서 남편이 나를 회유해도 좀체 타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순수 나와 그의 종교라기보다는 양가 부모님과 가정환경으로 가장 가까운 종교 환경설정인 '불가'에 조금 더 우리를 넣어보기로 했다. 타운당 몇 개씩 많게는 몇십 개씩 있는 교회에 비해, 절은 달라스 전체를 탈탈 털어 겨우 한 곳이 있었다. 학생에다가 미국의 삶에 대해 잘 모르는 우리 부부는 그 절에 불나방처럼 뛰어들었고 이내 '청년회 활동'의 급 주축이 되더니 남편은 급기야 그 절의 '총무'까지 일임하게 됐다. 그야말로 굴러들어 온 돌이 절의 '젊은 주춧돌'이 된 격이었는데, 이 안에서의 혀를 끌끌 차게 만들던 신구 세대갈등이나 스님과 운영진 간의 골이 깊은 갈등의 중심에 바로 우리 가족이 서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영주권을 약속하고 맡았던 총무일, 홍보직을 모두 내려놓고 큰 상처를 안고 절을 끊었다. 그 사이 큰 애가 태어났고 말 그대로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됐다. 일요일마다 가던 곳이 사라진 상실감을 대체할 방법이 없어진 우리 가족. 그렇다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찾아갈 모임도 딱히 없던 우리 가족에게 그때의 유독 일요일의 달라스는 너무나 황망했다.  토요일마다 "자기야, 어디 어디 교회는 규모도 작고, 사람들도 편안하다는데 한번...?' "아니... 뭐... 글쎄...." 이런 식의 시도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만 주고받다가 주말을 어정쩡하게 보내기 일쑤였다. 우리는 둘째를 끌어안고 결국 역이민을 강했했다. 우리가 한국에 돌아온 것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할 수는 없지만 영향이 없었다고도 결코 말할 수 없던 절 라이프. 그곳에서 나름의 상처도 많이 받았고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우리 부부는 이제야 그때를 회상하며  "참 많은 인생의 단면을 거기서 배웠다"라고 회상하고는 한다.




100일 새벽 글쓰기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오늘이 마침 딱 10분의 1 지점인 Day-10번째 날이다. 100일이라는 숫자는 묘한 힘을 가졌다. 이 100일의 힘을 믿게 된 계기는 신생아마다 있다는 그 기적을 네 아이를 통해서 보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아이들은 100일의 기적보다는 100일의 '기절'에 가까운 아이들이었다. 멋모르고 낳은 첫째라고 했다면, 이 믿었던 곳에 대한 갈등으로 오갈 데 없어진 우리 부부가 선택한 것은 '종교 홀로서기'였다. 때마침 찾아온 둘째 아이를 배속부터 잘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엄마의 진실된 마음이라고 결론짓고 마음을 넣은 태교를 할 겸 '100일간의 108배'라는 것을 스스로 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사실 나는 26년간 하루도 빼지 않고 다이어를 써온 '다이어리계의 미친 결심녀'다. 20년 넘도록 한결 같이 한 게 있다면. 결심 -> 자책-> 방황->재도전 -> 뉴플랜 이 다섯 개의 순환고리를 뺑뺑이를 도는 거다. 많이도 돌았다 정말. 토가 나올 정도로. 그렇게 오래 결심했던 것 중에 1번은 항상 '새벽 기상'이었는데, 이것에 대해 어떤 이들은 하면 된다. 막상 하면 쉽다 쉽다 하던데 나는 쉽게도(?) 26년 만에 이루어 냈고, 108 기도나 소원 노트도 100일을 성공해본 기억이 그때까지 전무했다.




간절하게 좋은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에 부응해  '100일의 기도'를 도전 한 만큼 이번만큼은 '절대. 네버' 중도 포기하지 않고 부지불식간에 페이드아웃되지 않기를 이를 꽉 깨물고 모성으로 다짐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해냈다. 그것을 해내던 당시 우리 부부는 '둘째 나오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을 많이 해야 한다'는 떠돌아다니는 말에 생명력을 마구 주입해 우리는 여행족으로 돌변했다. 시애틀에 갔고, (사촌동생 방 침대 옆바닥에서 엎드려 기도를 했다.) 콜로라도 로키산맥을 갔고 (옮겨 다니는 호텔마다 똑같은 초록 블랭킷을 깔고 염주를 꺼내고 108배를 했다.) 마이애미 비치에서도 시내 어느 카페에서도 (사람 없고 한 평의 공간만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내 기도는 멈출 줄을 몰랐다. 곰이 사람이 된다는 그 100일을 다 하고 났다.!


짠, 이제 사람이라도 되든, 뭐 마음의 훅 밝은 광명이라도 비치든 그래야 할 것 같은데...  헉..  이런 거였어? 모든 것은커녕 아무것도 달라진 것 하나 없이 세상과 심지어는 내 마음도 똑, 같. 았. 다.

"내가 100일간이나 기도를 하긴 했나?' 싶을 정도로 엉성한 마무리로 끝이 났다. 드라마틱한 변화까지는 아니더라도 '해보니 어떻더라'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렇게 '100일의 기적'은 기억에서 차츰 지워졌다.




'100일의 태교'를 유일하게 하사 받고 태어난 우리 집 둘째에게 유일한 출생의 신화가 하나 더 있으니 그는 바로 '유일한 자연분만자'라는 것이다.  큰딸은 미국에서 배 가르고, 셋째와 넷째는 남양주시 어느 산부인과의 같은 의사의 손에 의해 엄마 배를 가르고 세상에 나섰다. 그래서 자못 기대했다. "유일하게 자연분만, 그리고 100일 기도도 성공한 아이" 이 타이틀을 거머쥔 게다가 우리 집 장남 자리를 맡은 이 아이는 이런 기대에 크게 부응이라도 하듯, 태생부터 엄청난 힘을 보여줬다. 얼마간 눈을 잘 뜨지 못해 엄마를 혼비백산 병원을 찾아다니게 했고, 결국 이게 발화점이 되어 우리는 한국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알게 된 아이 병명은 '선천성 안검하수'였다. 


새로 고침으로 다시 시작한 한국생활에서의 활약은 더 엄청나다. 나를 지구 끝까지 폭발시켰으며, 미치도록 분노하게 했고, 가슴 치고 오열하고, 엄마라는 사람의 바닥을 끝까지 박박 남은 것도 없는 그곳을 긁어 생채기가 났다. 지난 11년간 우리 집에서 일어난 대형사고는 모두 이 아이의 손을 거쳐온 것이며, 버티고 버티던 엄마를 결국 심리상담소를 가게 했고, 그 성격 좋고 만사에 무난하던 아빠를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하도 힘들게 하던 아이를 놀이치료에 들여보내 놓고 대기실에 앉아 우리는 이런 얘기를 나눴다 "고생시킨 만큼 효도한다는데, 그 효도 안 받아도 되니까. 그만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라고 이게 이렇게까지 희생하고 받아야 하는 효도라면 백번이고 반납하자는데 우리는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100일 기도의 효험 같은 것을 얘기해 주고 싶어 미안해지지만 사실 그런 건 적어도 여태까지는 없다. "기도가 잘못됐나?"라는 농담도 곧잘 하곤 했는데 사실 이 아이의 미래는 기대된다. 나는 죽을만치 힘들었다지만 그 아이는 이제 겨우 10살 그리고 이제 겨우 어두운 1차 유아 사춘기 터널을 빠져나와 운동선수라는 자신의 길을 만나 날개를 펴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아이에게서 어떤 희망을 보았나? 그렇다면 나도?? 그러고 보니 여태 나를 위한 100일은 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나도 뭔가를 찾으려면 깔짝깔짝으로는 될 일이 아니라는 내면의 외침이 들리던 차였다. 


'자식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 나'를 위한 100일보다 그냥 순수히 나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불혹이 넘어서 도전했던 '100일간의 새벽 글쓰기' 힘은 금방 나에게 현실로 증명이 되어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출간 계약을 그리 짧은 시간 안에 많이 있던 그 중심에 바로 100일간의 새벽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이번엔 마루타다. 글벗 1호님을 필두로 함께 뜻을 모은 8분과 함께 100일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도 어떤 결실이 되어 언제 발화될지 아무도 예측할 없는 씨앗을 심는 행위들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진짜의 마음으로 믿는다. 깊이 심으면 더 뿌리 깊은 나무로 자랄 것이고. 더 양질의 씨앗을 심을수록 더 멋진 무엇이 되어 언젠가는 피어날 것을.

최고의 꽃은 그 씨앗에 맞는 꽃이다. 그 씨앗은 자신의 내면에서 최상의 것을 꺼내 심었을 때 가장 나다운 꽃으로, 나무로 자라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믿고, 잊지 않기 위해 늘 애쓰는 사람으로서 보이지 않지만 실존하는 이 공기 중에, 영혼에, 바람에 나의 이 소망을 실어본다.

지금 심고 있는 씨앗이 모두에게 행복한 꽃나무가 되어 피어나기를. 100일간 엄마 배속에서 함께 기도를 동행한 아이가 훌륭하게 자란 후 이 모든 출생, 한국행, 작고 큰 사건, 사고가 그 아이의 아름다운 역사가 되길..

사랑하는 큰 아들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남편과 글벗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엄마는 오늘도 소중한 100일의 꽃 씨중 하나를 가만, 심어 본다. 어느덧 글을 마치고 허리를 펴니 새벽어둠이 사라지고 세상이 밝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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