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리고 지난 下

by 시은

<5> 지금


그녀를 온전히 기록하고 나면 남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기현상도 사라질 것 같았다. 논리에 맞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녀가 이야기해 주지 않았던 그녀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추측했다. 사람들이 쉽게 드러내지 않는 뒷면을 쓰고 싶었다. 정신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허기가 몰려왔다. 삶의 어떤 순간에서도 허기는 찾아온다. 나의 정신과 관계없이 몸이 살기 위해 보내는 신호일테다. 샌드위치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나니 잠시 쉬고 싶어졌다. 오늘도 남편의 말이 이상하게 들리면 어떡하지, 걱정이 몰려왔다. 남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 금속 조각 같은 소리가 내 귀에 끔찍하게 들린다는 것도 문제였다. 하긴 아름다운 선율로 들린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혹시 오늘은 남편이 들어오지 않아서 내가 그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고, 하루 정도는 문제를 미뤄놓을 수 있지 않을까 불가능한 상상을 했다.

상상과 다르게 어김없이 8시가 조금 넘어서 남편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제처럼 기이한 소리도 여전했다. 마치 봤던 영화를 재생한 것처럼 똑같이 의아한 표정을 하는 남편을 바라봤다. 어제와 같다면 나는 다시 두통약을 먹고, 남편은 화장실로 들어가고, 그리고 또 나는 잠든 척을 해야 했다. 하지만 반복되던 흐름 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지듯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여보, 나 여보 말이…. 안 들려."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남편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제와 같은 의아한 표정이 잠깐 스쳤지만, 이번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이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내 금속 조각이 긁히는 듯한 소리가 다시 내 귀를 채웠고, 나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남편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그 소리는 여전히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무슨 말인가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면을 내게 내밀었다.

- 말이 아예 안 들리는 거야?

화면에 적힌 글자를 읽고 나는 고개를 젓고 말했다.

"아니, 이상한 소리로 들려."

내가 본 남편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글을 썼다.

- 나 말고 다른 사람 목소리도 그렇게 들려?

"아니, 몰라."

- 지금 확인해 볼래?

어떤 결과이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잠시 망설였다. 늘 선명하던 남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무언의 독촉을 이기지 못하고 핸드폰을 꺼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윤서야, 웬일이야?"

그녀의 밝은 목소리에는 금속성 소음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나는 대충 안부를 묻다 통화를 끊고 남편을 바라봤다.

"잘 들려."

아마도 멀쩡히 통화하는 상황을 보고 눈치챘겠지만, 잘 들린다고 말하는 내 말에 확인사살이라도 당한 듯 남편은 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남편은 다시 핸드폰에 글을 썼다.

- 내일 병원 가자. 같이 갈까?

"아니, 혼자 갈래."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동네 정신과를 찾았다. 새 건물에 입주해서인지 병원이 무척 깔끔했다. 초진으로 접수하고 의자에 앉아 호명을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둘러봤다. 요즘 정신과에 대한 문턱이 낮아졌다지만 내심 마음속에 거부감이 있었는데, 앉아 있는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로 평범해서 마음이 놓였다. 기다리는 동안 데스크에서 준 설문지를 작성했다. 증상이나 생활 패턴, 과거 병력, 가족력 같은 질문이었다. 유산 경험을 적어야 할지 망설이다 결국 적었다.

끝도 없이 긴 설문지를 적고도 30여 분을 더 기다려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예약을 안 한 탓이었다. 여자 의사는 내 또래처럼 보였다. 의사의 표정은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다정했고, 또 나를 동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남편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려요. 금속 긁히는 소리처럼요.”

의사는 안경 너머로 나를 잠깐 살피더니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설문지에 있는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듯했다.

"힘든 경험을 하셨네요. 고생 많으셨어요."

"하지만…. 일 년이나 지나기도 했고, 이제 아이를 가질 생각도 없어요. 이후로 몇 달은 노력해 봤지만 잘 안 됐고요."

의사는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내 말을 이해하고 있는 게 맞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나와 남편이 겪는 일은 특이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나에게 좀 더 증상이 '명확히' 나타날 뿐일 수도 있다. 타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이해하는 척 넘어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오히려 일 년이 지나서 그럴 수도 있어요. 제대로 풀어지지 않은 마음의 응어리를 오래 감당하다 신체가 보내는 신호일 가능성이 있어요. 물론 다른 원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요. 저랑 천천히 찾아봐요."

의사의 답변에 속으로 조소를 남겼다. 유산 때문이라니, 너무 쉬운 핑계를 내 손으로 넘겨준 게 아닌가 싶었다. 무당에게 점을 보러 가도 사람의 가장 약한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 듯 정신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다고 나 스스로 다른 이유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라,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잠을 설친다는 말에 의사는 약한 수면제를 처방해 주겠다고 했다. 잠이라도 깊게 잘 수 있다면 문제가 나아질까 싶어 순순히 의사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다음 약속을 잡고, 처방받은 약 봉투를 손에 쥔 채 집으로 돌아오며 나의 불신과 별개로 약으로 해결될 수 있는 증상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저녁이 되자 남편이 돌아왔고, 혹시나 하였는지 남편은 말을 걸어왔다. 변화는 없었다. 남편은 내 표정을 보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썼다.

- 병원 어땠어?

나는 약 봉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스트레스 때문이래. 약 먹으라고."

유산이니 뭐니,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다음 약속을 잡았다거나, 오늘 받은 약은 그저 수면제일 뿐이고 아마도 이 약으로 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도 물론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아이 이야기를, 아이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긴 모든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에 올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두 번의 유산,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큼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뒤로 나는 조용히 아이 방의 짐을 현관으로 내놓았고, 남편은 별말 없이 무거운 물건을 들고 가 처분해 주었다. 둘 사이에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내 방이 생겼다. 어쩌면 그때 남편과 좀 더 대화를 나눠보아야 했을까, 싶기도 했다. 남편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더니 다시 글을 썼다.

- 혹시 나 때문에 스트레스받은 거면 미안해. 신경 못써줘서 미안하고.

남편이 미안할 이유는 없었다. 남편은 본인의 역할 이상으로 우리 가정에서 잘 해내고 있었고, 오히려 이전보다 책임을 다하고 있지 않은 건 나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때문 아니야.”

말이 끝나자마자 남편은 또 썼다.

- 우리 오늘은 같이 자면 안 될까?

딱히 거절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서 우리는 오랜만에 같이 침대에 누웠다. 커다란 침대인데도 남편과 함께 누우니 제법 가득 차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전처럼 서로의 몸을 탐하거나 다정한 밀담을 나누지는 않았다. 다만 남편은 핸드폰을 만지다 종종 재밌는 영상이 있으면 보여주었고, 나는 이상할 정도로 그 영상들이 다 재밌어서, 세상에 그렇게 재미있는 게 있는지 몰랐다는 듯 얼굴을 젖히며 웃었다. 남편은 매일 나보다 먼저 잠에 들었고, 자면서 자꾸 손을 더듬어 나를 찾았다.



<6> 지난


점점 진영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처음에 그림을 가르쳐주겠다는 제안에 응한 건 단지 그녀에 대한 호기심의 연장선이었다. 그녀는 내게 수강비를 받지 않고 그림을 가르쳐주겠다며 서울로 올라오라고 했고, 나는 무리해서라도 거의 매 주말 기차를 탔다.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나는 머리를 턱선에 닿도록 짧게 잘랐고, 훤히 드러난 목덜미가 어색해 어색할 때면 목을 만지는 습관이 생겼다. 남편은 짧아진 머리도, 내가 열심히 서울에 다니는 것도 반가워했다. 난임 치료가 길어질수록 내가 무기력해지는 것 같다고 걱정하던 차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일이 내 의욕을 북돋아 주지는 않았다. 남편의 다정함도, 남편과의 관계도 여전했지만, 아이에 대한 생각은 점점 멀어졌다. 아이가 내 삶에 찾아오는 걸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두 번째 유산을 겪으며 자궁에 있던 폴립을 제거했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를 작은 덩어리는 아이가 버티지 못한 내 자궁에서 살아남았다. 아이는 살 수 없지만 용종은 살 수 있는 자궁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가끔 글을 쓴다는 이야기를 듣자, 진영은 내 글을 읽어보고 싶어 했다. 내 글을 보면 어딘가 도망치고 싶은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진영은 그러면서도 내 글이 좋다고 했다. 자신이 인물 뒤편의 그림자를 그리는 것과 내가 쓴 글이 닮아있다고. 그녀가 의자에 앉아 내가 쓴 글을 읽는 동안, 나는 그녀의 옆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그림이 어느 정도 진전되면 진영이 옆으로 와서 그림을 봐주는 식이었다.

"좀 과감하게 그려도 되는데."

진영은 그림을 가르칠 때면 반말과 존댓말 그 중간 어디쯤의 말투를 썼다. 아마도 그때 들은 말도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주 내 손을 잡고 붓을 움직였고, 나는 도구가 된 것처럼 그녀의 손을 따라갔다. 그녀의 손을 따라가는 동안에는 아무런 생각도, 걱정도 머릿속에 채워질 틈이 없었다. 그리는 시간은 나를 채우는 동시에 나를 비워내고 있었다. 정면을 바라보는 자화상을 그리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그림은 계속해서 다시 그려졌다.

그녀의 화실로 가는 길을 외우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유난히 길눈이 어두운 내가 길을 외웠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이 길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화창했던 집 앞의 날씨와 달리 기차에서 내려 마주한 서울의 날씨는 어쩐지 컴컴하고 축축한 공기로 가득했다. 우산을 사야 할까, 고민했지만, 현관에 가득 쌓여있는 우산을 생각하며 마음을 접었다. 화실에 갈 때까진 비가 안 올 것 같다는 대책 없는 낙관을 안고서. 기대가 무색하게도 지하철 출구를 나서 오 분쯤 걷자, 비가 쏟아졌다. 건물까지는 지금 걸었던 만큼 더 걸어야 했다. 길 한복판에서 갑자기 쏟아진 물줄기에 이미 옷은 젖어버렸고, 지금 뭘 사야 한다면 오히려 수건이 아닐까 싶었다. 길을 외워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뜀박질했다. 누구의 시선을 의식할 겨를도 없이 내 발걸음에만 집중하며 뛰었다.

화실에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에 가서 대충 핸드타월로 피부의 물기를 닦기는 했지만, 젖은 머리와 옷은 별도리가 없었다. 홀딱 젖은 내 모습을 본 진영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일었다. 늘 동요 없이 차분한 표정이었던 진영이 놀라는 모습을 보자 어쩐지 재밌어서 비를 맞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 그녀는 대뜸 나를 그려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지금 이대로요?"

진영은 내가 늘 앉던 패브릭 의자를 화실 중앙에 꺼내놓았다. 젖은 몸으로 앉기가 찝찝했지만, 진영은 재촉했고 결국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젖은 몸이 천에 닿는 감촉이 불편했다. 제대로 닦아내지 못한 물기의 감촉도, 엉거주춤 앉은 자세도 불편했다. 무엇보다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빤히 나를 바라보는 진영의 눈빛이었다. 이 공간은 치마 끝자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닥에 톡, 톡 닿는 소리 외에 아무런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진영이 그러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나는 보이지 않는 끈에 묶여있기라도 한 듯 자세를 추스르지도 젖은 머리카락에서 얼굴로 흘러내리는 물기를 닦지도 못한 채 그녀의 시선을 견디고 있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진영이 몸을 일으켰고, 그 순간 나도 마법에서 풀린 듯 몸의 긴장이 사라졌다.

"다 그렸어요?"

"스케치만. 완성되면 보여줄게요. 갈아입을 옷 좀 줄까요?"

진영은 화실 뒤편의 창고를 뒤지더니 두툼한 수건과 펑퍼짐한 트레이닝복을 찾아 건넸다.

"작업할 때 입는 옷이라 좀 더러워요. 그래도 지금보단."

진영은 아까와 달리 흘깃 나를 보았다. 지금의 젖은 옷보단 나을 거라는 의미인 듯했다.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털고, 물감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까만 트레이닝복을 입자 한결 쾌적했다. 수건도, 옷도 있는 진영이 나를 젖은 채로 한참 방치한 사실에 불쾌해해야 하나 고민하다 예술하는 사람의 변덕이려니 넘기기로 했다. 보송한 옷으로 갈아입으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번 더 그림을 배우러 갔지만 처음처럼 매주 가지는 못했다.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 탓에 주말에 밖으로 나갈 기운이 없기도 했지만, 그날 이후로 진영과의 사이가 어색해진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날 그린 그림을 결국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진영은 자신의 이야기를 잘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한 끼 밥조차 같이 하지 않은 사이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기는 어려울지도 몰랐다. 오히려 나는 그래서 진영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진영과 나의 관계가 어떤 사람과도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을 놓게 했다. 단 한 번 진영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직장에서 나오게 된 건 본인의 의사가 아니었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실수를 덮어주고 싶었다고. 그런데 결국 그 사람도 자신도 행복해지지 않아서, 그 이후로는 조금 이기적으로 굴기도 결심했다고. 자세한 과정은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 말을 꺼내는 진영의 표정이 퍽 씁쓸해 보였다.

비가 쏟아지던 또 어떤 날이었다. 그날은 다행히 우산을 미리 챙겨간 덕에 비는 맞지 않았지만, 비 오는 날 특유의 습한 공기 때문인지 화실의 분위기도 가라앉은 듯했다. 나는 유난히 말수가 없는 진영을 의식하며 그림을 그렸고, 그녀는 언제나처럼 내 옆에 앉아 내 손을 잡고 붓을 이끌었다. 그러다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늘 갈색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눈빛이 그날따라 깊고 어두웠다.

"윤서야."

그녀는 낮게 속삭였고, 뜻밖의 호명에 나는 그녀에게 시선을 멈췄다. 한 번도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는데, 분명한 무례에 반응할 말을 찾는 새 내 손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미묘하게 떨려왔다. 그 떨림 때문인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계속 머릿속에서 되뇄지만,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 역시 침묵할 뿐이었다. 결국 눈을 먼저 피한 건 나였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허둥지둥 가방을 챙겨 화실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녀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몇 번 문자를 남겨봤지만, 답이 없었고, 전화를 걸어도 신호음만 울릴 뿐이었다. 결국 나는 제대로 된 그림을 한 점 완성하지도 못했고, 진영이 그린 나를 보지도 못했다. 몇 달의 그림 수업 끝에 남은 결과물은 처음에 몇 번 장난처럼 그렸던 엽서가 전부였다. 남편은 왜 그림을 더 이상 배우러 가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보다는 내가 산부인과 예약을 더 이상 잡지 않는 이유를 묻고 싶었을 것이다.



<7> 지금, 그리고.


정신과 치료는 어느새 나의, 우리 부부의 일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의사의 상투적인 말을 들으며 딴생각하기 일쑤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의사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병원에서 나올 때마다 묘하게 마음이 가벼워졌고, 꾸준히 병원에 다니는 모습에 남편도 마음을 놓는 듯했다.

남편과는 일주일에 한두 번 방을 같이 썼다. 어떤 주에는 세 번이기도 했다. 항상 남편이 먼저 물어왔고,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남편과의 잠자리가 불편해 몸을 뒤척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깊게 잠에 들었다. 남편은 매일 내게 말을 걸었고, 또 매일 내가 그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 확인하고 그의 핸드폰 화면에 적힌 글자들로 대화를 나눴다.

그쯤 진영에 대한 기록도 끝마칠 수 있었다. 그녀에 대한 기록을 마치면 남편의 말소리도 예전처럼 돌아올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지만, 마음에서 무거운 짐을 덜어낸 것처럼 홀가분해진 건 분명했다. 나는 그녀를 기록하며 그 시절의 나를 털어내고 있었다. 사라져 버린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순 없겠지만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의 나는 어딘가 도피처가 필요했고 진영은 그 역할을 해줬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진영도 어떤 도피처를 찾아 떠났겠다고 생각했다. 진영이 떠난 곳이 진영에게 안식처가 되길, 떨리는 손으로 누군가를 붙잡지 않아도 되는 곳이길 바랐다.

그녀에 대한 기록을 마치고 나자, 우리가, 그녀가 머물던 화실을 다시 찾아가 보고 싶어졌다. 남편은 오랜만에 내가 제안하는 외출에 화색이 돌았다. 아마도 진영은 그곳에 없겠지만, 지금 어떤 모습으로 그 공간이 바뀌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우리는 오랜만에 손을 잡고 걸었고, 아주 오랜만에 함께 기차를 탔다. 뒷좌석에는 대여섯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와 우리 또래의 남자가 함께 타 있었다. 남편의 뒤에 아이가 앉았고, 아이는 종종 남편의 의자를 차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잠들지 않았고 메모장을 켜서 계속 내게 말을 걸어왔다.

- 뒤에 꼬마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네.

불평하는 듯한 문장이었지만 남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어려있었다. 우리는 어느새 남자아이가 잠들어 조용해졌는데도, 메모장으로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뒷자리 아빠는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듯 고개를 꾸벅였다.

어느새 흐릿해진 길을 따라서 진영의 화실이 있었던 건물에 도착했다. 진영의 화실은 아동미술을 가르치는 공간으로 변해있었다. 노란 시트지가 창문 바깥에 붙어 존재감을 나타냈다. 구태여 올라가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건물 앞에서는 프리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옷가지와 액세서리를 판매하고 있는 부스에 멈춰서 구경하다 눈에 들어오는 모자가 있어 거울 앞에 섰다. 모자를 쓴 내 얼굴보다 거울에 함께 비친 남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난생처음 보는 얼굴을 확인하는 것처럼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낯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남편이 아주 멀리에 서 있는 것 같다가, 이내 나와한 몸처럼 가까운 존재 같기도 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내가 비쳤고, 나는 그 안에 담긴 나를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지금 그림을 다시 그린다면 남편의 눈에 비친 나를 그리고 싶었다.

남편의 목소리는 몇 달이 지나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끔찍하게 들리던 금속성 소음에 익숙해졌고, 우리는 여전히 필담으로 소통했다. 남편은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출근하고 오랜만에 혼자 찾은 백화점에서, 내 발걸음은 아이 옷 매장에서 멈춰 섰다. 예쁘게 자수가 그려진 손수건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그뿐이었다.

이전 04화지금, 그리고 지난 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