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리고 지난 上

by 시은

<1> 지금


일상을 깨트리는 데, 한 마디면 충분했다.


저녁 8시, 나보다 조금 빠르게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소리, 대비되어 느린 듯한 발걸음 소리. 비염으로 인해 킁킁거리는 콧소리까지 지루할 만큼 익숙한 일상의, 남편의 소리였다. 최근 들어 부쩍 야근이 잦아진 남편은 저녁을 밖에서 먹고 들어오는 일이 잦았고 나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남편을 기다리곤 했다. 그러나 남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말이 아니었다. 녹슨 금속이 갈리는 소리, 사람의 것이 아닌 무언가가 목구멍을 긁어대는 소리였다. 나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뭐라고?"

그러나 내가 뱉은 말이 무색하게도 더욱더 째지는 듯한 소리가 돌아왔다. 남편의 얼굴에 의아함이 퍼졌다. 선명한 이목구비, 흠 없이 매끄럽고 하얀 피부, 그리고 특히 칭찬을 많이 받는 큰 눈망울. 남편은 객관적으로 봐도 미남이었다. 영업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남편에게 분명 잘생긴 얼굴은 꽤 도움이 되었을 테지만, 가끔 나에게는 남편의 눈동자가 낯설게 보일 때가 있었다. 세상의 어두운 면은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끝도 없이 맑고 투명한 눈빛.

내게 건넨 말이 별 내용이 아니었는지 남편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끊임없이 우리를 웃음 짓게 하던 대화 화제가 사라진 뒤로 이전에 우리가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 남편도 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 뒤로 나는 쉽게 짜증이 났고, 때로는 무기력했으며, 아주 가끔은 사라지고 싶었다. 남편은 나를 돌려놓으려는 노력을 그만두었고, 오히려 그 노력이 사라지고 나자, 우리 사이는 이전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평화로워졌다.

이내 남편이 들어간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는 두통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오전부터 머리도 지끈거리고 몸살기가 있었다. 아마 지금의 기현상은 내 몸 상태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섣불리 추측했다. 남편에게 말해서 괜히 함께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생각하다 두통약을 벌써 3알째 먹은 걸 깨달았지만 별수 없다. 화장실 문에 대고 먼저 들어가 자겠노라고 말을 건넸다. 물소리 사이로 다시 그 금속 조각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한 번 휘젓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남편의 말이 이렇게 들린 건 처음이었지만 내 정신이 이상해진 건 하루이틀 사이의 일은 아니었다. 고장 난 자동차를 그럭저럭 끌고 다니는 것처럼 살고 있으니 지금 같은 일에도 크게 놀라지 않는지도 몰랐다.

남편과 각방을 쓴 지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원래는 아이 방으로 쓰려던 공간이었다. 아이를 완전히 포기한 뒤로 방 안에 있던 아이 물건을 끄집어내고 내 짐을 옮겼다. 남편의 코골이를 핑계로 댔지만 나와 남편 모두 사실은 다른 이유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떨어져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의 웃음소리, 아이의 젖비린내로 가득 찼을지 모를 이 방에는 건조한 냄새만이 맴돌 뿐이었다.

어제 아이가 나오는 꿈을 꾼 탓에 두통이 찾아온 것 같았다. 꿈속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세 가족이었다. 어젯밤 꿈의 장면이 선명히 눈앞에 떠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저 끝없는 잠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2> 지난


“청년들이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

노숙인 무리 사이에 멀끔하게 차려입은 40대 중반의 남성이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아마도 설교를 마치면 나눠줄 음식을 기다리는 노숙인 무리와, 한 끼라도 굶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남성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보였다. 기차역을 나오는 사람들은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바삐 걸었다.

“쯧, 시끄럽게.”

남편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짐이 가득한 캐리어를 한 손으로 들고 나머지 손으로는 내 손을 잡은 채였다. 나는 남편의 말에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프지 않아? 빵이라도 사다 줄까?”

허기는 없었으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배고프냐고 물었다는 것은 본인이 배고프기 때문일 것이고, 잠시 혼자 있고 싶기도 했다. 역 안에 위치한 빵집 앞에 몇몇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다행히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인 덕으로 기차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남편은 캐리어를 내 손에 맡기고 그 줄에 섰다. 내 취향을 정확히 기억하는 남편은 내가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크루아상을 사 올 것이다.

나는 캐리어의 묵직함을 느끼며 대합실의 빈 의자에 앉았다. ‘지루하다.’ 문득 생각했지만 이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뺏겼다. 기차역은 내가 좋아하는 장소 중에 하나다. 아무리 사람을 지켜보아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장소였다. 이곳에는 오래 머무르는 사람이 없다. 다만 매표원 셋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애플리케이션으로 표를 예매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매표소에는 줄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매표원이 있기에 줄 서는 사람이 있는 걸까, 줄 서는 사람이 있기에 매표원이 있는 걸까, 의미 없는 공상에 빠진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 혹은 지루해 보이는 사람, 그들 사이를 지나다니는 비둘기 따위를 지켜보고 있으니, 남편이 돌아왔다. 버터 향이 가득한 크루아상을 입안에 가득 물었다. 입안이 꽉 차는 느낌이 안정감을 준다. 목이 퍽퍽해질 때까지 빵을 씹어 밀어 넣는다. 남편은 얼른 챙겨 온 생수를 열어 건네준다.

물을 건네준 남편은 이번 여행에서 갈 식당 이야기를 잠깐 하더니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도 핸드폰을 열었다. 주말의 SNS에는 온통 즐거운 일들이 가득했다. 나도 기차역에 오며 탔던 택시에서 남편과 찍은 사진을 올렸다. ‘기차역 가는 길은 항상 설렘’ 금세 '좋아요'가 눌렸다. 남편도 내가 올린 스토리를 공유한다. 두 번째 유산을 겪은 뒤로 SNS에 행복한 일상을 올리는 게 의무처럼 느껴졌다.

어느새 기차 시간이 다 되었다. 우리 뒷자리에는 젊은 엄마와 어린아이가 탔다. 나는 부러 아이의 앞에 가 앉았다. 아이가 발로 좌석을 찰까, 남편의 신경을 거스를지 걱정된 탓이었다. 남편은 아닌 척했지만, 최근 들어 모르는 아이가 저지르는 실수에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내 배가 불러있을 때 남편은 세상 아이가 하는 모든 일에 관대한 사람이었다. 남편은 기차가 출발하자 곧 잠들었고, 아이는 걱정과 다르게 얌전했다. 엄마에게 작은 소리로 소곤거릴 뿐이었다. 기차 안에서는 시간이 빨리 가는 법이다. 눈을 떠보니 서울이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인구 10만이 갓 넘는 작은 도시였다. 그중에서도 내가 살던 동네는 더 작은 곳이었다. 누구 딸이요, 아들이요. 하면 다들 아는 체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사실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아빠와 똑 닮은 내 얼굴이 신분증이 되었다. 대학을 가고 취직하며 조금 큰 도시로 왔다지만 오래 살아보니 이 도시도 다를 바 없었다. 내가 모르는 타인이 나를 안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다가왔다. 운이 좋았다. 남편과 남편의 가족은 이 도시의 토박이였고, 대부분의 사람과 잘 지냈다.

그래서인지 서울에 오면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커다란 기차역 같은 도시였다. 나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들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도시. 상념에 빠지려는 순간 어떤 남성의 목소리가 다시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만세, 만세!”

맥도널드 앞에서 만세를 부르짖는 아저씨는 오래되었지만 잘 작동하는 기계 같았다. 손을 쭉 뻗어 올렸다 내리는 동작이 일정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서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겠지만, 아직 목청이 쌩쌩한 걸 보니 한동안은 저 자리를 지킬 것 같았다. 나는 남편을 쿡쿡 찔러 아저씨를 가리키고, 남편은 픽, 웃었다.

“서울에는 별사람들이 다 있어.”

숙소로 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수많은 서울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다. 이 사람들 사이에 영영 묻혀 살아갈 순 없을까, 빽빽한 사람 물결에 몸을 기대니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서울 외곽에 잡은 숙소로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로 바쁘게 사라져 가고, 내려야 할 역이 되자 지하철 칸은 제법 한가해졌다.

역에서는 젊은 여자 한 명과 우리 부부 두 사람만이 내렸다. 숙소는 역에서 10분 정도 걸어야 했다. 나는 숙소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지친 상태였고, 남편도 말수가 없어졌다. 조금 끈적해진 손을 자연스럽게 놓고 터덜터덜 걷던 차에 아까 함께 내렸던 젊은 여자가 우리와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혹시 목적지가 같으려나, 생각하다 숙소에 도착했다.

아기자기하고 깔끔한 내부 사진을 보고 예약했는데 막상 도착한 숙소의 외관은 평범한 빌라 같았다. 다소 실망한 마음을 감추며 숙소 주인이 보냈던 메시지를 찾았다. 요즘 숙소는 어딜 가나 무인으로 입장하니 주인의 얼굴은 볼 길이 없다. 그런 방식이 편하기도 하면서, 간혹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바로 지금, 지금처럼 보내준 비밀번호가 맞지 않을 때처럼 말이다. 두 번 세 번 확인해 봐도 분명 정확히 비밀번호를 입력했는데 1층 현관은 야속하게도 열리지 않았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고 다시 메시지를 찬찬히 읽어봐도 틀림없다. 남편의 말대로 주인에게 전화를 걸려던 차 뒤에 함께 서 있던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혹시 에어비앤비로 예약하셨어요?"

"네, 네! 여기 예약하셨어요?"

"아, 저는 이 건물 입주해 있는…. 하여튼 거기 주인이랑 아는 사이라서…. 제가 문 열어드릴게요."

여자는 능숙하게 비밀번호를 치고 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받은 비밀번호가 이건대 혹시 다른가요?"

"아, 뒷자리가 하나 빠졌네요. 받으신 건 5자리, 비밀번호는 6자리예요. 받으신 비밀번호에서 숫자 하나 더 치시면 돼요. 그…. 아마 여기 주인이 해외여행을 가서 연락이 잘 안 될 거예요. 무슨 일 있으면 저는 숙소 바로 옆에, 화실에 계속 있으니까 찾아오셔도 돼요. 구경하러 오셔도 되고요."

손님을 받아놓고 해외여행을 떠났다는 주인의 무책임함에는 화가 치밀었지만, 시원시원하게 말을 건네는 그녀에게는 호감이 일었다. 2층 숙소 방 바로 옆에 있는 그녀의 화실에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

"친절한 사람이네. 짐 풀고 들러볼까?"

남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나를 보며 물어왔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숙소 문을 열었다. 다행히 숙소 내부는 애플리케이션에 올라와 있던 사진과 그대로였다. 빛이 환하게 들어 오히려 사진보다 더 좋아 보이기도 했다. 청소도 깔끔하게 잘되어있고, 에어컨도 미리 켜놓았는지 방 안이 시원했다. 주인은 없어도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짐을 풀고 샤워까지 하고 나니 더 기분이 나아졌다. 저녁 공연까지는 시간이 좀 있었다. 원래는 카페를 갔다가 공연을 보러 가려는 계획이었지만 아까 남편이 말한 대로 옆의 화실이나 구경하러 가보기로 했다.

화실에서 그녀는 분주하게 청소 중이었다.

"저어…."

"어,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아내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들렸어요."

남편이 자연스럽게 그녀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녀의 얼굴을 처음으로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은 피부에 화장기 없는 얼굴,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과 오뚝한 코, 두툼한 입술. 전통적인 미인상은 아니었지만 세련된 인상이었다. 작은 얼굴에 길쭉한 팔다리가 더해지니 더욱 그랬다. 그녀에게 화실에 대한 설명을 듣다가 테이블 위에서 명함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김진영' 평범한 이름이었다. 명함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진영이 아는 척을 했다.

"아, 혼자 그림도 그리지만 수업도 해요. 그림 좋아한다고 하셨죠? 멀리서 오셨을 테니까 꾸준히 레슨은 어렵겠지만 원데이도 종종 해요. 한번 연락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명함을 지갑에 챙겼다. 사실 그림 그리는 일을 즐기지는 않는다. 나는 그리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좋다. 나는 보통 추악함에 대해 쓰는 편이었는데 추악한 것들은 그림으로 옮기면 너무 적나라해 보여서였다. 아이가 세상에 나온다면 아이를 그려주겠다고 마음먹기는 했었지만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었다. 커다란 그림은 부담스러워 그녀가 그린 엽서를 몇 장 집어 들고 화실을 나섰다. 엽서에 그려진 동물들은 하나같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3> 지금


눈을 뜨자 남편은 이미 출근했고, 집에는 적막이 가득했다. 원래라면 남편이 출근할 때 함께 집을 나섰겠지만, 복잡한 출퇴근길에서 벗어난 지도 일 년이었다. 다행히 함께 일했던 선후배, 동료들이 주는 일감으로 내 몫의 돈은 벌고 있었다. 남편의 벌이만으로도 두 사람이 살아가기엔 충분하지만 내 몫의 돈은 내가 벌고 싶었다. 처음에 남편은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에서 쉬라고 했지만 이젠 포기한 눈치다. 꼬박꼬박 공용통장에 이전처럼 돈을 넣고 있지만 남편은 그 통장에는 손도 대지 않는 것으로 작게 항의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 방에는 여전히 건조한 냄새만이 맴돌았지만, 방 밖으로 나가면 남편의 향기가 가득했다. 남편이 출근한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 테지만, 그의 흔적은 집 안 곳곳에 남아있었다. 마치 남편이 혼자 사는 집 같기도 했다. 내가 이 집에서 점점 지워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한 밀크커피를 내리며 커피색이 꼭 진영의 눈빛 같다고 생각했다. 그 눈빛이 나를 바라보던 순간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실처럼, 팽팽한 긴장감은 내 인생에서 처음 느껴보는 야릇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팽팽한 실은 결국 끊어지는 게 인생의 법칙이었다. 그녀와의 만남도, 이별도 어느 하나 내가 선택한 것이 없었기에 지금까지도 문득문득 진영이 떠오르는지 모른다.

한참을 쓰지 못했던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 노트북을 펼쳤지만, 손끝에서 맴도는 단어들은 좀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진영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쓰는 게 아니라 도망치는 거 같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 말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쓰는 척하며 현실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랍을 열어 그녀의 명함을 꺼냈다. 종이는 시간이 지나며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지만, ‘김진영’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선명했다. 나는 명함을 손에 든 채로 창가에 섰다. 그녀와 보낸 시간은 분명 내 안의 어떤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자극적인 탄산음료를 마신 이후처럼, 잠시의 갈증만이 해소될 뿐 결국 더 심한 갈증이 남았지만.

잠시 핸드폰을 들었지만, 그녀의 번호를 누르지는 않았다. 번호가 그대로 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책상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나는 새 문서를 열고 쓰기 시작했다. 그녀를 담은 글을 쓰고 싶었다.



<4> 지난


진영을 다시 만난 건 그해 가을이었다. 남편과 함께했던 서울 여행 이후, 나는 그녀의 화실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명함을 지갑에 넣어둔 채로 몇 번이고 꺼내 보았지만, 연락할 용기는 내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SNS에서 그녀의 전시 소식을 보았다. ‘김진영 개인전: 그림자’ 전시장 주소는 그녀의 화실이었다.

남편에게 그녀의 전시를 보러 가겠다고 말하자 의외라는 반응이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남편은 언제나 나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신혼집을 꾸미면서도 늘 그랬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나의 결정대로 이루어졌다. 주변에서는 다정하고 세심한 남편을 만나 부럽다고들 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가끔, 내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가는 게 부담스러웠다. 내가 결정한 일이라면 내가 책임져야 했다. 인생조차도 누군가 결정해 준다면, 책임지지 않고 살아도 될 것 같았다.

화실은 전시를 위해 조금 개조된 상태였지만 그녀는 여전했다. 손님들과 이야기하고 있던 그녀는 쭈뼛거리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어머, 오셨어요?"

숙소에서 한 번 본 사람이 전시까지 찾아와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을까, 걱정한 것이 무색할 만큼 그녀는 나를 환대했다. 그녀는 손님들은 뒤로하고 내 손을 붙잡아 그림을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묘하게 힘을 주어 잡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지만, 착각이려니 여겼다. 사람과 그림자, 각각 다른 사람과 그림자가 하나가 될 듯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이건 나야."

그녀가 한 그림 앞에서 멈추며 말했다. 진영을 닮은 여인 뒤로 까만 표범이 캔버스 한가운데에서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시종일관 상냥하게 존댓말로 대화하던 진영의 말투가 순간 바뀐 걸 깨달았지만 정정하지 않았다. 그다음 말부터는 다시 원래의 말투로 돌아와 타이밍을 놓친 탓이었다.

"전시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실래요? 두 시간 정도, 여기 앞에 카페에서 기다리시면 될 것 같은데."

진영은 내 의사를 물어봤지만 어쩐지 그대로 따라야 할 것 같았다. 화실 문을 나서며 한 시간쯤으로 잡았던 기차 시간을 변경했다. 내가 왜 진영의 말대로 행동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랜만에 혼자 나온 터라 좀 더 밖에 있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진영이 추천한 건물 앞 카페는 아늑했다. 구석의 2인용 자리에 앉으니 눈이 감겨왔다. 요즘 카페는 회전율을 위해 딱딱한 의자만 가득한데 이 카페에는 몸을 감싸는 푹신한 의자가 많았다. 졸린 눈을 붙잡으며 태블릿으로 책을 읽다가 결국 몰려오는 잠에 백기를 들었나 보다. 누군가 툭, 하고 이마를 치는 감각에 눈을 떴다. 진영이었다.

"피곤하셨나 봐요."

"아, 여기 카페가 아늑해서요. 저도 모르게."

오히려 나보다는 진영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진영은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말했다.

"윤서 씨, 저번에 봤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머리 잘라보는 거 어때요? 단발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성인이 된 뒤로 계속 길러왔던 머리였다. 남편이 단발을 좋아한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된 뒤로 몇 번인가 머리를 잘라볼지 생각했지만, 오히려 남편이 만류했다. 나 때문에 오래 길러온 머리를 자르는 건 원치 않으며, 단발이든 긴 생머리든 나는 이미 완벽히 자신의 취향이라는 이유였다.

"그럴까요?"

그런데 왜일까, 진영의 말 한마디에 머리를 자를 결심이 든 것은.

"네, 다음에 한 번 보여주세요. 전시는 어떠셨어요?"

"좋았어요. 전부…. 대단하신 것 같아요."

뭔가 더 그럴싸한 말로 감상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좋았다, 는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진영은 그 정도의 감상으로도 만족했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며, 진영이 나보다 세 살 어리고 원래는 디자이너로 일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작은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남편과 결혼한 지 이 년이 되었고, 아이는 없다는 이야기. 실은, 아이를 원했는데 잘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진영에게 들은 정보보다 내가 너무 많이 말한 것 같았지만 진영은 조용히 들어줄 뿐이었다.

"다음에, 또 만날래요? 그림 가르쳐주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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