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말

by 시은

가뭄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더니, 쨍한 하늘이 변심하는 것은 순간이었다. 비가 쏟아진 지 삼 일째였다. 아니, 사 일째 인지도 모른다. 달력을 봐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집 안에 있는데도 내리는 비로 인해 정신이 혼미한 듯했다. 얼마 만에 외출인가, 장을 봐 돌아오는 사이에도 비를 피하긴 어려웠다. 구색처럼 들고나간 우산 사이로 비가 몰아쳤다. 축축한 신발의 느낌이 불쾌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장바구니를 던져놓고, 신발을 벗었다. 젖은 양말이 현관에 쩍 붙었다 떨어진다.

"비 많이 와?"

언니는 거실 소파 앞에 이불을 깔고 엎드려있었다. 소파가 제 역할을 상실한 지는 오래되었다. 거실이라면 마땅히 소파가 있어야 한다는 듯, 언니와 이사를 준비하며 침대 다음으로 산 가구는 소파였다. 그런데 막상 소파에 누가 앉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가 인사를 왔을 때 정도일까, 이 소파에 언니와 나, 그 사람이 어색하게 앉아 있던 날도 어느새 오래전이었다.

"응."

짧게 대답하고 양말과 함께 젖은 옷가지를 욕실에 던졌다. 그 모습을 언니가 흘깃 바라본다.

"우산 챙겼어?"

"챙겼지. 근데 소용없었어."

언니는 대꾸 없이 리모컨을 누르며 채널을 돌렸다. 뉴스에서 비 피해 소식이 흘러나왔다. 무미건조한 말투로 전해지는 수해 소식 사이로 어느 다리 밑에서 익사체가 발견됐다는 말이 꽂혔다. 언니는 대수롭지 않은 듯 다시 채널을 넘겼다.

"어디래?"

"응?"

"방금, 그 익사체 말이야. 어디서 나왔대?"

"글쎄, 정확히는 못 들었는데. 서구 근처였나 봐."

심드렁한 목소리에 더 묻지 않았다. 언니는 다른 사람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 아마 나에게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엄마가 죽었을 때도 언니는 금세 정신을 차리더니 셋이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이 집을 구했다. 내가 며칠 밤낮을 울다 쓰러지고, 깨어났을 때 이미 언니는 혼자서 이삿짐까지 다 꾸린 채였다. 엄마의 흔적이 남은 집을 마음대로 처분한 것이 분하기도 했지만 그 집에서 잠을 이룰 자신도 없었다. 그때도 그는 나와 함께였다.

그가 떠난 건, 일 년 전 이맘때였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별 사소한 이유로 우리는 싸우기 시작했고, 나는 악을 질렀다. 나쁜 습관이었다. 슬픈 일이 있으면 울다 쓰러져야만 하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악을 지르다 지쳐 나가떨어져야 했다. 그는 가만히 내 말을 들었다. 그 모습이 어쩌면 우리 언니 같기도 했다. 언니에게 서운한 마음을 더해 풀기라도 하듯 나는 우산도 없는 그 사람을 등지고 집으로 갔다.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며칠 뒤 그가 보낸 택배가 도착했다. 젖은 편지 한 장과 내가 좋아하던 그의 물건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왜인지 다른 물건은 멀쩡한데 편지만이 물로 가득 번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 괜찮아.

그중에 내가 유일하게 알아본 말은 그 한 단어였다. 그는 늘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전 재산을 전세 사기로 날리고도, 취업의 문턱 앞에서 동기에게 밀리고도. 아마 내가 그렇게 악을 지르고 그를 보낸 날도 그는 뒤에서 괜찮다고 말했을 것이다. 언니도 그도 괜찮은 일들이 나는 늘 괜찮지 않았다. 나는 물건만 잃어버려도 삐죽삐죽 눈물이 났다.

"또 거기 갔어?"

언니가 물어왔다. 언니는 내가 습관처럼 그와 헤어진 장소에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거짓말."

대꾸하지 않았다. 내가 왜 자꾸 거기로 돌아가는지 설명하려고 해도 말이 입 안에서 물처럼 흘러내릴 뿐이었다.

"걔는 살아 있어."

"알아.

"너랑 헤어지고 물에 빠져 죽은 게 아니라 멀쩡하게 잘 사는 사람이야."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언니가 잠든 밤, 나는 다시 그 다리 밑으로 갔다. 낮보다 더 세차게 내리는 비에 바지 밑단이 진창에 젖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비 오는 날엔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이 잘 안 보여."

"왜?"

"우산 때문에 다들 고개를 숙이고 다니거든."

"그럼 넌 왜 고개를 들고 다녀?"

"혹시 지나가는 네 모습을 놓칠까 봐."

그 말이 좋아서, 비 오는 날마다 부러 고개를 들고 걷곤 했다. 오늘도 평소처럼 고개를 들고 걸어봤지만 세찬 비에 인적은 드물었고 동네 곳곳에 물웅덩이, 차가운 공기만 가득했다. 신발이 미끄러지고 머리칼이 흠뻑 젖었다. 누군가 나를 스쳐 지나갔지만 고개를 푹 숙였다. 비 오는 날에는 어차피 얼굴이 잘 보이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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