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하루는 머리를 빗는 것으로 시작됐다. 손끝에 감기는 머리카락은 가볍게 떨어졌다. 색이 바랜 염색약 자국처럼, 그늘진 무늬가 머리카락 사이를 흘렀다. 빛이 창을 타고 방 안으로 들어왔지만, 온기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햇살이 먼지를 비추었다. 부유하는 입자들 사이에서 그녀는 거울 속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거리에서는 사람들의 시선이 스쳤다. 말을 걸지 않았지만 눈으로는 충분히 많은 것을 말했다.
"저런 몸으로도 잘도 다니네."
들리지 않는 말을 들으며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흙먼지 날리는 바닥을 바라보는 것이 한결 마음 편했다.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누구도 그녀가 왜 그러고 있는지를 묻지 않았지만, 상상은 그 빈 틈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상상이 만든 날 선 말들이 그녀의 내면을 찔렀다. 그럼에도, 그녀는 밖으로 나왔다. 그녀에게는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다. A가 속한 그룹은 이른바 '지하돌'이라고 불렸다. 데뷔 2년 차. 월급 주는 것도 빠듯해 보이는 작은 소속사, 팬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방송 출연은 물론, 정식으로 발매한 자체 곡도 없이 커버 곡으로 활동하는 그야말로 마이너 그룹이었다. 그녀가 처음 A를 알게 된 건 유튜브 알고리즘 덕이었다. 우연히 떠오른 커버 영상, 작은 행사장에서 부드럽고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A의 모습이 그녀의 가슴을 건드렸다.
"이 사람에게는 내가 필요해."
그의 일정을 쫓는 것이 그녀의 새로운 일상이 됐다. 지방 공연, 팬 사인회, 길거리 버스킹까지. 버스비, 숙박비, 밥값이 빠져나갈 때마다 통장은 가벼워졌지만, 그의 미소를 볼 때면 그 빈자리가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지하돌이라 불렸지만, 그녀에게는 더없이 밝은 햇살이었다. 소속사 직원의 제안으로 팬클럽 회장을 맡으며 지출은 더 커졌다. 소속사와 연락을 주고받고, 이른바 '조공'을 바치기 위해 팬들을 독려했다. 그녀를 포함해 겨우 두 자리의 인원이 들어와 있는 단체카톡방에서 그녀는 활발하게 공지를 올렸지만 적극적으로 대답하는 건 몇 되지 않았고, 자연스레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소득도 있었다. 꾸준히 팬클럽 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멤버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휴대폰 번호도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매일 밤 A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공연 정말 멋졌어요."
"오빠, 힘내요!"
답장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그가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읽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녀는 하루를 버틸 힘을 얻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무대 위의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는 기분이었다. 공연이 끝나면 멤버들은 꼭 자신을 찾아와 준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그 짧은 대화에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쩌면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다정함이었다.
그러나 다정한 날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소속사 카페에 A가 활동을 중단한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햇살이 다시 먼지를 비추었다. A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A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니라 차가운 안내음이었다.
"사용 중인 번호가 아닙니다."
다시 걸었다.
"사용 중인 번호가 아닙니다."
반복되는 안내음에 그녀의 손이 떨렸다. A가 떠났다. 단톡방에 A의 복귀를 위해 움직이자 는 글을 올렸지만, 반응은 심드렁했다. A를 대체할 수많은 대체품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소리였다. 그녀는 궁지로 몰렸다. 아니, 궁지로 몰렸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팬클럽 활동을 위해 일을 그만둔 상태였다. 통장 잔액은 마이너스로 내려앉았고,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쌓였다. 화면에는 ‘대출 연체’라는 메시지가 계속 떴다. A가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세상이 선명히 그녀의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화기를 뒤집고, 소리를 껐다. A가 없는 세상에서, 그녀는 나갈 이유를 잃었다.
침대에 누워 기계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던 어느 날, 게시물 하나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요즘 축구 선수들 얼굴 수준. jpg'
여러 선수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던 그녀는 어느 한 사진에서 멈췄다. 2군 축구 선수인 B의 얼굴은 A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부드러운 이목구비, 살짝 굽은 입꼬리.
"운명이야."
그녀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의 등번호는 7번. 희망적인 숫자였다. B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데뷔 3년 차, 1군에 잠시 올라간 적도 있었지만, 계속되는 부진으로 2군으로 내려왔고, 2군에서도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팬들 사이에선 회의적인 말들이 오갔다. 그녀는 축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가 성공하는 모습 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오히려 그 부진이 그녀를 더 끌어당겼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의 경기 일정을 찾아냈다. 다음 주, 근처 경기장에서 경기가 있었다. 그녀는 다시 세상 밖으로 향했다. 경기장은 작고 한산했다. 관중도 드물었다. 그녀는 맨 앞자리에 앉아 그의 등번호 7번을 찾았다. B는 몸을 풀고 있었고, 이어서 코치와 대화하는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경기가 시작되고 그가 뛰어나갔다. 그의 발이 공에 닿았지만, 공은 골대를 벗어났다. 관중석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들고 있던 간식을 내려놓고 입을 다물었다. 공격은 실패했지만, 그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보는 순간, A의 공연을 처음 봤던 순간처럼 가슴이 뛰었다.
"한 번만 더 해봐."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날 이후, 그녀는 B의 경기를 빠지지 않고 따라다녔다. 변변한 식사를 해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 먹고 싸구려 모텔에 묵으면서도 햇살은 그녀의 눈을 멀게 했다. 어느 날, B가 찬 공이 골망을 흔드는 순간,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잘했어!"
주변 관중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지만,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B가 고개를 돌려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 손짓만으로 그녀는 모든 걸 감수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부산행 버스표를 끊었다. 기차표보다 버스표가 저렴하기 때문에 3배나 걸리는 시간을 감수하고 버스에 오른다. 버스 안은 더웠고, 쿰쿰한 냄새가 돌았다. 땀이 주르륵 흘렀다. 하지만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은 반짝였다. 그녀는 그에게로 가는 길 위에 있었다. 어쩌면 그 길 위에서만, 그녀는 숨을 쉴 수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