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삭 임산부가 바라본 세상
만삭이 가까워지며, 오 년 넘게 탔던 차를 처분했다. 중고로 구매한 터라, 세상에 나온 지 십 년 가까이 되었던 차였다. 차에는 주인의 흔적이 진하게 남는다. 아마도 나에게 있어 유일하게, 오롯이 혼자였던 공간. 운전이 서툴던 시절 남겼던 외관의 스크래치와 발을 구르던 습관 탓에 얼룩진 안쪽 차 문은 감가의 이유가 되었다. 내 나름의 애정을 담았던 차가 숫자로만 평가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꽤 속상한 일이었다.
물건에 정을 붙이는 성격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정이 가는 물건들이 있다. 오래 입은 잠옷, 베개 대용으로 몇 년간 사용했던 잠만보 인형,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샀던 노트북.. 그리고 그중 단연 1위는 자동차가 아닐까 싶다. 몇 년을 매일같이, 지루한 출퇴근길부터 주말 나들이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정이 안 가기도 어렵다. 이전에 한 번 가벼운 접촉사고가 나서 대차를 받은 적이 있는데, 같은 사이즈의 차량인데도 어찌나 어색하던지. 꼭 낯을 가리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여기저기 긁힌 흔적도 많고 엔진부터 각종 기관들이 말썽을 부려 속을 썩기도 했지만, 내 차 운전석에 앉을 때가 가장 편안했던 것 같다. 결혼생활 중 남편과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을 때 갈 곳을 찾지 못한 내가 가장 먼저 향한 곳도 운전석이었으니 말이다. 막상 나가서는 갈 곳이 없어 근처를 한 바퀴 돌고 머쓱하게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여러 사연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차를 넘겨준 지 몇 달이 지난 지금, 남편의 차 조수석이 더없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내 몸에 맞춰 한껏 뒤로 젖혀진 조수석에 거의 눕다시피 앉아 남편과 재잘재잘 떠드는 출퇴근길이, 이제는 하루의 낙이 되었다. 함께 출퇴근을 하게 되니 대화하는 시간이 확실히 늘었다. 별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많긴 하지만, 집에서 챙겨 온 간식을 남편과 나눠 먹는 것만 해도 즐겁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들을 보며 운전자마다 제각기 다른 모습을 관찰하는 것도 퍽 흥미롭다. 누군가는 한 손으로 여유롭게, 누군가는 두 손을 꼭 붙잡고 긴장한 채 도로를 달린다. 한 손에 담배를 든 이도 있고, 잠시 정차한 틈에 바쁘게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이도 있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그 공간 안에서, 저마다의 삶이 조용히 펼쳐진다.
그 풍경을 보며 문득 생각한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나도 저들 중 하나였다. 밀리는 도로에서 틈틈이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시끄럽게 노래를 틀어놓던 시간. 만삭이 된 지금은 운전대를 잡을 일이 거의 없다. 대신 남편의 옆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아기도 나와 함께 바깥 구경을 하는 듯 툭툭 반응하기도 한다
어느 날은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차들 사이 한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앳된 아이가 있는 젊은 부부였다. 차 안에서도 분주해 보이는 엄마를 보며, 곧 나와 남편도 저런 풍경 속에 있겠지, 상상해 봤다. 남편이 혼자 탈 때는 크다고만 느껴졌던 차는 어느새 아이의 짐으로 꽉 찼다. 셋이 함께 떠나는 첫 드라이브가 머지않았다. 남편은 아마 처음 운전하던 날처럼 긴장할 것이고, 나는 그 옆에서 호들갑을 떨겠지. 시간이 지나 그 풍경마저 익숙해질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조수석 의자를 눕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