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퇴의 맛은 새콤달콤

by 시은


음식은 따듯해야 제맛이라며, 국이건 탕이건 팔팔 끓여서 연기가 날 때 식탁에 내려놓는 것이 내 오랜 습관이었다.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며, 반찬 하나를 꺼내놓아도 예쁘게 접시에 플레이팅 하는 건 친정엄마에게 배운 요령이고 말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 부부는 식은 요리, 대충 반찬통에 담긴 반찬으로 식사를 때우기 일쑤다. 우리 집에 찾아온 작고 사랑스러운 손님을 보살피는 일 때문이다.

우리의 하루는 새벽 다섯 시에 시작된다. 출근하는 남편은 잠시라도 편하게 눈을 붙이라며 나와 자리를 바꾼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단잠을 깨우는 건 아이의 칭얼거림이다. 휴대전화 시계는 오전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아이방으로 향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아이와 나는 단둘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엄마 품 안에서는 세상 더없이 순한 아이다. 그럼에도 아이와 함께하는 일과 중에 제대로 된 밥을 챙겨 먹기는 어렵다. 남편의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나도 아이도 들뜬다. 남편이 아이를 돌보는 동안 밀린 집안일을 서둘러 해치우니, 아이를 씻길 시간이 다가왔다. 아이를 씻기고, 다시 마지막 수유를 하면 아이는 잠에 들고 우리의 '육퇴'가 찾아온다. 이런 하루가 벌써 100일째 반복되고 있다.

오늘은 아이가 평소보다 이른 시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조심스럽게 아이를 침대에 옮겨 재운 후, 남편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은 아이를 보느라 확인하지 못했던 야구 중계를 얼른 확인했다. 내내 뒤지고 있던 우리 팀이 역전 기회를 잡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소리를 줄인 채 야구 경기에 집중했다.


"배고프지 않아?"


경기에 집중한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남편이 물었다. 사실 하루 종일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기지 못했던 터라 속이 허했다.


"라면 끓여줄게."


고개를 끄덕이자, 남편이 제안했지만, 나는 대답 대신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뒤져 김치를 꺼내고, 찬장에서 소면을 찾아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고 싶었다.

김치를 송송 썰고, 양념을 만들었다. 고춧가루, 설탕, 식초, 참기름을 적당히 넣고 비비니 새콤달콤한 양념이 완성됐다. 삶아낸 면에 차가운 물을 끼얹어 헹구고, 김치와 함께 양념에 버무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은 아니지만, 이 차가운 비빔국수 한 그릇에는 오늘 하루의 피로를 달래주는 특별한 힘이 담긴 것 같았다.


"자, 김치 비빔국수 나왔습니다!"


커다란 대접에 국수를 담아 거실로 나오니, 남편이 반가운 표정으로 자리를 정리해 주었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 TV 화면을 바라보며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젓가락에 국수를 가득 말아 호로록 넘기는 순간, 새콤달콤한 양념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맛있다."


남편이 면을 돌돌 말아먹으며 말했다. 비빔국수가 바닥을 보일 때쯤, TV에서는 우리 팀이 끝내기 안타를 날리는 장면이 나왔고, 우리는 아이가 깰까 봐 소리를 죽인 채 조용히 환호했다. 달콤한 순간이었다. 국수 그릇을 비우고 나서도 우리는 한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함께 먹는 야식의 맛은 기념일마다 썰었던 스테이크보다 훨씬 달콤했다.


"언젠가 예온이도 커서 우리랑 같이 야식 먹겠지?"


남편이 말했다. 나는 문득 상상해 봤다. 몇 년 후 우리 아이가 김치 비빔국수를 호로록 먹는 모습을. 아마 양념이 입 주위에 묻어 빨간 얼룩이 생기고, 면을 제대로 못 말아서 흘리기도 하겠지만, 그런 모습조차 사랑스러울 테다. 그러고 보니 내 김치 비빔국수 레시피는 친정엄마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던 우리 자매를 위해 엄마가 가끔 만들어주던 비빔국수의 맛을, 그때 그 행복의 맛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는가 보다.


"그러게."


그 순간을 떠올리며 남편에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이 오기까지, 이렇게 소소한 야식의 행복을 하나씩 쌓아가며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뒤척이는 소리에 나는 얼른 빈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언젠가 다시 찾아올 야식의 시간을 기대하며 우리는 바삐 움직였다. 김이 펄펄 나게 뜨겁지도 않고, 예쁘게 차려지지도 않은 김치 비빔국수가 우리에게 바삐 움직일 힘을 선물했다. 오늘 우리 가족 육퇴의 맛은 '새콤달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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