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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하룻 Apr 09. 2024

퇴사 후 쓰는 반성문

네가 아닌 나를 위한

사건의 중앙에 있을 때 자신을 객관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건이 빚어낸 감정들이 시야를 뿌옇게 흐리기 때문이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 안개가 개이듯 감정이 잦아들며 자신을 좀 더 객관화해서 볼 수 있게 된다. 나 역시 시간이 꽤 흐른 후에야 과거 회사에서의 내 모습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01 이 직업만이 단 하나의 선택지라고 생각한 것

우습지만 나는 내 직업이 내 인생에 찾아온 유일한 특권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집안, 학벌, 외모 뭐 하나 특출난 것 없는 인생에서 직업만은 남들보다 조금은 운 좋게, 진입 장벽이 높고, 연봉도 높은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지극히 내 기준에서)

또 직업은 내 삶의 가장 큰 역경이었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었다. 그와 함께 마음 깊이 새겨져 있던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과 내 존재에 대한 우울감을 꽤 극복하게 되면서 직업이 가지는 의미가 내게 더 공고해졌다.

내게 이 직업은 생계유지 수단 이상의, 조금 더 온전한 인간으로의 진화이자 극복의 의미를 가졌다. 그래서인지 이 직업을 통해 얻은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이 길에서의 성공은 절대적 성공, 실패는 절대적 실패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경쟁이 치열한 이 세계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나름의 노력과 정성을 다했다. 쏟아부은 노력이 커질수록 집착과 불안도 커져만 갔다.


02 거부권의 상실

인생은 누구에게도 공정한 대가를 보장하지 않는다. 불행히도 나는 노력을 투입하면 절반 정도는 대가로 돌아오길 기대하는 답답한 모범생이었고, 그 믿음을 전제로 회사에 거의 모든 자원을 투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불공정하다고 인정할만한 일이 내게도 몇 차례 일어났다. 내 노력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관적으로 불공정하다고 느껴지는 일들도 나날이 늘어났다.

돌아보면 재직 당시 나는 주로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사이드아웃’이란 애니메이션에서 Anger(번역:버럭이)를 ‘He cares very deeply about things being fair.'라고 소개하는데 나의 재직 당시 심정 그 자체를 말하는 듯했다. 나는 화를 누르기 위해서 꽤 많은 에너지를 소진해야 했다.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안타까운 이유는 거부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정당한 분노를 표현하고 부정적인 상황을 거부하거나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껏 쌓아온 알량한 것들마저 물거품이 될까 두려웠고, 앞으로 있을 작은 기회마저 빼앗길까 무서웠다.

표현되지 못한 분노는 아무리 노력해도 정당한 대가를 얻지 못할 수 있다는 좌절을 내 마음에 심었다. 부정적인 상황을 거부하거나 포기하지 못한 것도 나 스스로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을 안겨주었다.


03 회사라는 곳에서 내가 놓친 것들

나는 나의 직업을 너무 특별히 여긴 나머지 집착했다. 쏟아부은 노력만큼 공정함을 기대하면서 분노라는 감정에 사로잡힌 채 회사 생활을 보냈다.

가장 후회가 되는 점은 그 분노라는 감정이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삼켜 버렸다는 점이다. 인생의 불공정하다는 진리를 수용하고 조금 더 먼 미래를 계획하며 인내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은 그 직업을 유지하지 않아도 나의 인생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까 괜찮다. 하지만 평행세계의 어딘가_퇴사하지 않은 내가 있다면 그 모습도 궁금하다. 어쩌면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것들도 있을 수 있으니까.

또 하나 후회가 되는 것은 사람이다. 회사를 다닐 때 만나는 인간관계는 결국 일을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을 형식적으로 또는 수단으로 대하고 선을 지켰다. 업계에 쉬이 나는 구설수가 무서운 것도 있었고 귀찮다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만큼 공통된 관심사를 갖고, 비슷한 수준과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또래와 선후배를 만나서 양질의 정보를 나눌 수 있는 경로도 흔치 않단 생각이 뒤늦게 든다. 내가 여유를 갖고 그들을 수단이 아닌 한 사람으로 만나고자 했다면 많은 것들을 나눌 수 있었을지도 몰랐겠다.




재직 당시 나는 피해자적 서술을 멈추기 힘들었다. 나는 부단히 노력하는 선량한 일꾼이기에 나를 둘러싼 무자비한 가해자들과 부당한 환경 속에 갇힌 나를 끊임없이 가여워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르니 새로이 보인다. 선량한 일꾼을 자처한 것도 나 자신이고, 부당한 환경에 가둔 것도 나 자신이며, 선택지를 하나만 제공한 것도 나 자신이었다. 많은 불공정한 것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많은 좋은 것들은 놓친 것도 나 자신이었다.

이제는 그것을 또렷이 보고 가지런히 두고 나아가보려 한다. 다시는 나 스스로 나를 가두지 않도록.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나를 용서하고, 나를 지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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