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제 퇴사를 곁들인_기쁨 편
퇴사자로서 가족과 지인들에게 받는 당연스러운 오해는 나의 회사생활이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었을 거란 생각이다. 내 입장에서는 공식적인 항변이 어려운 측면이 있다. 우선 퇴사라는 중대한 결정에 대해 납득할만한 근거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내가 겪었던 불편을 적극적으로 이해시켜야 한다. 어쭙잖게 좋았던 점도 많았다고 부연하다간 퇴사라는 결정마저 돌이켜 마땅한 것으로 오인될 가능성이 있다.
'퇴사 시점' 회사에 대한 나의 생각은 더 이상 용인할 수 없고, 극복하기 힘든 상태였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헤어진 연인이라고 해서 그들이 사랑했던 시간을 부정할 수 없듯, 헤어진 내 커리어에도 미화할 필요는 없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기쁨이 있었다. 그 기쁨들을 돌이켜 보려고 한다.
일을 하면서 느꼈던 자기유능감은 내게 소소하지만 가장 온전한 직장생활에서의 행복이었다. 일을 처리하는 과정, 그 결과물 등이 스스로 꽤 우수하다고 느낄 때 차오르는 만족감! 그것은 어떤 행복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내 경우에는 누군가 잘한다고 치켜세우면 그걸 단순 칭찬으로만 듣지 못하고 다음에 더 잘해야겠다는 부담으로 느끼거나 부차적인 잡념들이 따라와서 오히려 복잡해졌다.
잘 쓴 보고서, 광활한 정보의 취합과 매끄러운 논리의 구축, 일에 몰입해서 분주히 뇌가 작동하고, 나의 기능을 최선으로 발휘될 때 조용히 느끼는 유능감은 내게 꽤 중독적이었다. 그 감정에는 길고 긴 노력의 결과 더 이상 어리고 부족한 초보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꽤 쓸만한 사회의 일원이라는 자부심 같은 게 녹아있었던 것 같다.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나는 이 아름답고 번화한 도시에 반해버렸다. 그리고 곧 이 넓은 도시에 내 몸 하나 뉘일 곳이 없으며, 내 맘 하나 마땅히 정 붙일 곳이 없다는 고독이 찾아왔다. 학생은 자유롭지만 보통 궁핍하기 때문에 도시가 제공하는 무궁무진한 (유료의) 자원을 누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가 사는 이 도시가 한없이 좋으면서도 그것이 내 것 같지가 않았다.
인턴으로 첫 취직 후 새벽까지 야근하고 택시로 귀가하는 날이 있었다. 장시간 모니터를 들여다본 탓에 저절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올림픽대로를 지나며 까만 한강과 어우러진 빛나는 야경을 보는데.. 비로소 이 도시가 내 것 같았다. 인턴 월급 140만원에 15만원 정도 떼는 세금마저 내가 이 도시의 일원으로서 도리를 다하는 듯하여 뿌듯한 지경이었다. 흠모하던 이 도시에 자그맣고 마땅한 내 자리가 생겼다는 소속감은 내 결핍의 많은 부분을 채워줬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적정 거리를 두는 게 현명하다고들 한다. 나는 천성이 솔직하고 애착추구형 인간인지라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도 애정하고 싶어 했다. 덕분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 당시에는 마땅한 이유 없이 내게 냉담한 사람들이 많다고 느꼈는데, 돌아보니 그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럴듯한 이유도 없이 나를 사랑하고 응원해 줬다.
잠시 쉴 때 의자를 돌려 앉아 동료들과 나누던 스몰톡, 시답잖은 장난들이 그립다. 대가 없이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주고, 부당한 현실에 함께 분노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연대가 있었다. 내 노력과 능력을 한껏 올려쳐주고 잘 되길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항상 한둘은 곁에 있었다.
선배들은 (그들에겐 이미 지나가서 흥미롭지 않았을) 나의 갖은 고민과 투정을 밤새워 들어줬다. 후배들은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나와 좋은 관계를 가지려 애쓰고, 실은 별 볼일 없는 나를 기꺼이 존중해 줬다.
돌이켜보면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은 장면마다 선명한 즐거움이었다. 직장생활은 내가 자발적으로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사람들을 내 옆에 찰싹 붙여두었지만 그 덕에 다양한 인간 유형과 다채로운 즐거움을 누렸다.
어쩌면 내가 회사를 떠나야만 했던 이유는 지독히 사랑했기 때문도 있는 것 같다.
간혹 마음이 힘들어지면 '딸에게 미리 쓰는 실연에 대처하는 방식'이라는 글을 찾아 읽는다. 나는 내가 회사생활을 바보처럼 사랑하고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그 노력에 변명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새로운 한 시절을 맞았고 내가 지나온 회사생활에서의 기쁨과 슬픔은 켜켜이 쌓여 나의 삶을 이룰 것이다. 그중 가장 고운 것들을 모아 나를 아름답게 할 것이다.
..
시간의 힘을 빌리고 나면
사랑한 날의, 이별한 날의 풍경만 떠오르겠지.
사람은 그립지 않고 그날의 하늘과 공기,
그날의 꽃향기만 니 가슴에 남을 거야
(중략)
사랑했음에 변명을 만들지 마라.
한 시절이 가고, 너는 또 한 시절을 맞을 뿐.
사랑했음에 순수했으니
너는 아름답고 너는 자랑스럽다.
..
- 딸에게 미리 쓰는 실연에 대처하는 방식 (서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