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못된 며느리 & 악처였을까?
당신이 그날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그냥 잊어버린 거야. 왜? 남의 일이니까. - 영화 [올드보이]에서
최근 남편에게 이혼 얘기를 꺼내면서 예전일에 대해 물었다.
“ 나한테 왜 그랬어?”
남편은 그때 상황을 제대로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다. 억지로 기억을 더듬으며 횡설수설하는 남편이 미웠다.
그때 일을 기억조차 잘 못하고 있단 사실이 괘씸하고, 서러워서 난 오열을 하며 이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 어떻게 그 일을 기억 못 할 수 있어? 난 그날 일이 아직도 너무 생생해서 당신을 볼 때마다 분노가 치미는데 말이야.”
내 말에 남편은 늘 그랬듯이 자신이 미안하단 말만 반복한다.
“ 그래.. 내가 다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뭘 잘못했는지, 무엇 때문인지 이유도 모르면서 무조건 미안하다고만 하는 게 과연 진심일까?
지금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형식적, 습관적으로 하는 사과 같아서 그에게 더욱 화가 난다.
하지만 바보 같게도 날 달래기 위해 내 몸을 억지로 잡아 끌어안는 남편을 차마 뿌리칠 수도 없다.
임신 초기에는 길면 한 달씩, 짧으면 며칠씩, 잦은 출장으로 주말 부부를 하며 대부분 혼자서 시간을 보냈다.
원래부터 혼자 있는 걸 싫어하기도 했지만, 임신 초기에 집에 혼자 있으려니 너무 외로웠다.
외로움을 떨치고자 중간중간 지인 부탁으로 가벼운 아르바이트도 며칠씩 했었지만, 입덧으로 몸만 더 고될 뿐 나아진 게 하나도 없었다.
임신 초기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새벽 1시가 넘어간 시각. 평소 내 돈 주고는 사 먹지도 않던 고기만두가 무척 먹고 싶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임신한 아내가 늦은 밤 남편에게 음식 심부름을 시키던데…
쓴웃음을 지으며 어두운 길을 나서서 만두를 포장해 와, 홀로 불 꺼진 집에서 tv만 틀어놓고 먹었던 기억이 난다.
9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만두만 보면 그때 일이 떠올라서 주책맞게 울먹거릴 때가 있다.
임신 중기 때는 신혼집으로 이사를 했고, 남편은 내내 야간에만 일을 했었다. 아침 6-7시나 돼서야 퇴근하고 와서 한숨 자고, 늦은 오후에 일어나서 이른 저녁 한 끼를 먹고 다시 출근하고를 반복했다. 그래서 임신 때 남편과 야식을 먹었던 날이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나마 쉴 수 있는 주말에는 남편을 따라 시댁에 가야했다.
그때 내가 남편에게 늘 했던 말이 있다.
“ 이번 주말도 또 시댁에 간다구? 나랑 연애 때는 이렇게 매주마다 부모님께 안 갔던 것 같은데, 결혼하더니 효자 됐네.”
임신후기
어느 날 내가 언제 출산할지 모르는 이 시점에 남편이 일주일 동안 타지역으로 교육을 들으러 간다고 한다.
임신 막달인데 안가면 안되겠냐고 물었으나, 남편은 꼭 가야한다고 했다.
결국 임신 초기부터 출산을 앞둔 지금까지 주말부부, 잦은 출장, 야간근무 등으로 꾹꾹 눌러 담은 외로움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돼? 차라리 그딴 회사 그만 둬!!”
그런데 남편은 내 말에 신경질을 냈다.
되려 신경질을 내는 남편의 모습에 오히려 더욱 큰소리로 쏘아붙이는 나를 향해 남편은 말했다.
“ 그럼 네가 나가서 돈 벌어와.”
우리집 경제권은 남편에게 있다.
결혼한 지 9년 째인 아직까지도 난 남편의 급여가 얼마인지 모른다.
물어봤자 두리뭉실하게 대답할 뿐 정확한 액수를 대답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초기에는 경제권을 네가 갖니, 내가 갖니 하며 종종 다투기도 했지만 시간이 서서히 지나면서 내가 필요한 만큼의 생활비를 받으며 지내는 게 더 편해졌다.)
남편은 삼형제 중 장남이다.
제일 늦게까지 장가를 못 가 노총각이었던 남편은 자신 앞으로 가입한 보험도 여러 개였고, 시어머니의 보험료도 내고 있었다.
다달이 내야 하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보험료는 꽤 큰 금액이었다.
특히나 시어머니 보험료만 해도 몇 만 원의 수준이 아니라 달마다 몇 십만 원의 수준이었고, 남편의 월급으로 이제 우리 세 식구도 살아야 하는데, 남편도 워낙 보험도 많이 들어놓기도 했고, 시어머니의 보험료까지, 무언가 ‘이건 아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산을 앞두고 타 지역으로 일주일이나 잡힌 교육 일정건으로 시작된 나와 남편의 싸움이 결국 내심 신경 쓰였던 시어머니의 보험료까지 주제가 번지게 되었다.
어머니도 수입이 있으시니 어머니 보험료를 본인이 내시면 안 되냐, 그리고 매일 타 지역으로 출장이다, 교육이다, 야간 근무만 시키는 이딴 회사는 퇴사하고,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긴 다음, 안정이 될 때까지 당분간 허리띠 졸라가며 살면 되지 않냐는 게 내 주장이었다.
( 그 때 내가 남편에게 받았던 한달 생활비는 120만원이었고, 그 생활비로 내 보험, 태아보험, 관리비, 공과금, 식비, 통신비, 렌탈료, 출산준비물 구입 등으로 썼고, 생활비에서 아낀다는 건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남편은 퇴사라는게 말이 쉽지, 현실적으로 어렵다.그리고 어머니 보험료는 터치하지 말아라. 보험료 내드리는 게 억울한 거냐, 내가 번 돈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너도 직접 돈 벌어라, 네가 번 돈은 친구들한테 퍼주든 남한테 퍼주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너도 터치하지 말아 달라고 하며 점점 격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편과 난 결혼 후 처음으로 크게 다퉜다.
남편의 마음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네 돈, 내 돈 따지기만 할 뿐 정작 내가 애초부터 왜 화를 내게 됐는지, 임신 기간 내내 외롭고 허전했던 마음은 조금도 헤아려주지 않는 남편의 모습에 서운함과 화남, 그리고 배신감까지 물 밀듯이 밀려왔다.
결국 난 화를 삭히지 못해 씩씩대며, ‘ 당신이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내가 이 집을 나가겠다.’고 통보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남편이 방에서 나가려는 날 한쪽 벽으로 밀어붙이더니 내 목을 졸랐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지만, 남편의 광기 어린 눈빛을 정확히 봤다.
몇 초 뒤 본인이 한 행동에 본인도 놀랐던 건지 갑자기 방 밖으로 뛰쳐나갔고, 난 두려움에 떨며 방문을 급하게 잠궜다.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듯한 남편은 흐느끼는 소리로 나를 부르며 결국 문고리를 부숴 방으로 들어왔다.
남편의 손에는 부엌 가위가 들려 있었다.
남편의 모습에 엄청난 공포를 느꼈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임신 막달이라 산처럼 불러온 배가 심하게 아플 정도로 배뭉침이 와서 다리에 힘을 주고 서있기도 힘들었지만, 살고 싶다는 본능에 남편과 최대한 거리를 두기 위해 딱딱히 뭉친 배를 부여잡고 조금씩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대뜸 들고 있던 가위를 내밀며 무릎을 꿇었다.
“ 나는 죽어도 싸. 정말 미안하다. 이 가위로 날 찔러.”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이 상황이 너무 무섭고 납득이 되지 않았던 나는 바로 112에 신고를 했다.
나의 신고를 받고, 금방 경찰 두분이 오셨다.
일단 나는 거실, 남편은 방안으로 분리를 시켰고, 경찰분들은 볼록히 불러있는 내 배와 아기용품을 보시고 금방 임신인 중인 것을 아셨다.
내 상태에 대해 물으셨고 괜찮다는 내 대답에 남편과 따로 있길 원하냐고 물었으나, 난 ‘놀래서 신고를 했는데, 다행이 지금은 괜찮다. 남편과 같이 있겠다.’고 했다.
경찰분들은 부숴진 문고리,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가위를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셨고, 무슨 일이 생기거든 바로 전화를 주라며 신신당부를 하고 돌아가셨다.
이 날의 일은 이렇게 마무리가 됐다.
현재 남편은 이 날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내가 아무 이유 없이 퇴근하고 돌아온 자신에게 바가지를 긁어서 그런 거 아니었었냐고 되려 반문을 한다.
내가 오열을 하며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언제까지 과거에 메여 있을 거냐고 답답해한다.
그때 내가 남편과 당장 헤어지지 않고 살았던 건, 물론 곧 태어날 아기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날 우리 둘 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다시 차근차근 대화를 나눴을 때 남편이 울면서 한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돌려놓았기 때문이다.(이것 또한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쉽게 마음이 풀린 걸 것이다.)
“ 내가 혼자였다면 이딴 회사 당장이라도 때려치웠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아이까지, 우리 세 식구 내가 책임져야 하잖아. 그래서 생각 없이 덜컥 그만둘 수는 없단 거 당신이 더 잘 알잖아. 그리고 장남으로써 부모님을 당연히 도와드리는 것도 있지만, 쌀이며 양파며, 대파, 고구마, 참기름, 반찬이라던지 내가 본가에서 들고 오는 것도 많잖아. 내가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가족이 생기니 어머니가 더 신경 써주시고, 많이 챙겨주시려는 걸 아니까 미안하고 감사해서 자주 갔었어. 그리고 그냥 빈손으로 받기만 하기 죄송하기도 해서 일도 도와드리고 얼굴도 자주 비췄던 거야. 본가에 자주 가는 게 싫다면 그건 최대한 조절할게. 어머니 보험료도 내가 부모님께 나중에 말씀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줘. ”
한 번도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남편이었는데, 큰 다툼 후 울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걸 보고 있으니 마음 한 켠으로 남편도 장남으로써, 가장으로서 티는 내지 않아도 속으로 마음고생이 심했겠구나 안쓰러운 마음이 조금은 들었다.
그리고 시댁에 가는 일로 내가 너무 지나친 건 아니었는지, 시어머니 보험료도 아까워서 남편에게 바가지 긁는 악처이면서, 못된 며느리가 된 것 같았다.
나도 잘한 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날 그 일은 그렇게 조용히 지나가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