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입사 첫해인 2003년도에 있었던 일이다. 그 당시 나는 프로그램을 하나를 맡게 되었다. 그날의 프로그램 내용은 ‘교통수단’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시간이었다. 장애인들이 이해되기 쉽도록 교통수단을 그림으로 준비했다.
“한 주 동안 잘 지내셨죠? 자! 오늘은 우리가 타고 다니는 교통수단에 관해 이야기 나누어 볼까 해요.”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준비해 간 그림을 보여주면서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승합차, 버스, 택시, 지하철 등 하나하나 이야기를 이어갔다. 버스 그림을 보여 주자 장애인들은 ‘버스’라고 대답했다. 다른 장애인이 ‘버스는 캠프 갈 때 타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때 느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버스를 일상생활 속에서 타기보다는 특별한 날에만 타는 하나의 이벤트성으로 알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어릴 적 생일이나, 어린이날에 엄마가 사 주시는 ‘통닭을 먹는 기분 같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질문에서 프로그램 진행을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지하철 그림을 보여 주자 장애인들은 ‘기차’라고 대답했다. 나는 기차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지하철이라고 설명했다. 한 분이 눈을 반짝거리면서 질문하였다. “선생님 더 설명해 주세요. 저는 지하철을 실제로 본 적이 없어요. 상상이 잘 안 가요.” 궁금해하는 병*씨를 위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궁금증은 다 풀리지 않은 듯 한 얼굴이었다. 병*씨는 장애 정도가 중증 장애인이어서 이곳이 오픈하면서 전원 되신 분이다. 흔히 케어가 힘든 장애인들이 도시에서 시골로 전원 되기도 한다. 그전까지는 서울에 있는 시설에서 살았다. 나는 병*씨에게 서울 살 때 지하철을 타 본 경험이 없으셨냐고 물었다. 그러자 “에이, 걷지도 못하는 저를 누가 데리고 다녀요? 시설이 저에게는 전부였어요. 학교도 입학하자마자 걷지 못해서 쫓겨났다."라고 말했다. 나는 ’아!‘하면서 더는 말하지 못했다. 그날 프로그램 일지를 결재 맡으면서 사무국장에게 병*씨의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병*씨에게 지하철을 태워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 여기 사시는 분들 다 타고 싶을 거예요.’ 그러면서 겨울에 들어가는 난방비로 겨울 내내 마이너스인 시설의 재정상 태도 듣게 되었다.
비장애인들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탈 수 있는 지하철이 병*씨에게는 타보고 싶은 ‘꿈’ 같은 일이었다. 그 당시가 2003년도였기 때문에 그전에는 병*씨뿐만 아니라 중증 지체장애인은 지하철을 이용할 수 없었다. 중증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이용하기 위해 지하철 선로에 눕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이 이슈가 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중증 장애인들이 지하철 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결국 장애인 이동권 운동은 2004년 12월 29일 '교통 약자의 이동 편의 증진 법' 제정이라는 성과를 냈다. 또한 당시의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전 역사에 상당히 많은 수의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 지하철 이용을 위해 휠체어 리프트 추락 사고가 있었다. 그 후 리프트가 장애인이 사용하기는 부적절함을 알았다. 리프트를 이용할 때 나는 음악 소리를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소리는 크고 요란하다. 모든 사람을 집중하게 만든다. 누구를 위한 서비스인지 모르겠다. 지금 장애인이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하고 있다는 알림 서비스다. 리프트를 이용하는 장애인은 마치 동물원에 있는 동물이 된 느낌일 것이다. 장애인 당사자는 자신의 상태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이 불편하다. 더구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목이 쏠리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그러한 이유로 장애인은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을 꺼리기도 한다. 기관이나 정부는 하나의 정책을 만들 때 당사자의 의견을 들어봄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놓치는 부분이 없는 전제하에 편의시설을 만들어지면 좋겠다.
병*씨가 ‘시설은 나에게 있어서는 세상의 전부다.’라는 말이 귓가에 쟁쟁 맴돌았다. 나는 병*씨의 소원을 꼭 들어주고 싶었다. 시설 재정의 부족하지만, 지하철을 탈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방법을 찾고 있었다. 우연히 그 당시 유행하던 싸*월드에서 ‘사연을 받습니다’라는 문구에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래 바로 저거야’ 하며 ‘한 번도 타 보지 못해서 지하철 타는 게 소원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병*씨의 사연을 띄었다. 며칠 후 싸*월드에서 연락이 왔다. 홍보 활동을 통해 사연을 본 네티즌들이 도토리를 기부한 만큼 후원금을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3주 동안 지인 찬스와 인근 학교, 군부대를 돌면서 발로 뛰며 홍보했다. 평상시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 하는 성격이지만, 이번만큼은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였다. 꼭 병*씨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 결과 도토리는 50,000개가 모였다. 그렇게 500만 원으로 병*씨뿐만 아니라 70명의 장애인 전원이 지하철을 이용해 서울문화 탐방을 하게 되었다.
사무국장은 지하철을 타고 서울 문화 탐방만 하고 내려오기가 아쉽다.‘라고 하셨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말처럼 1박 2일 가정문화체험을 제안하셨다. ‘70명의 장애인이 가정문화체험을 할 수 있도록 신청하는 가정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선생님들의 지인 찬스로 몇 집을 섭외를 하고, 보호자들에게 요청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험 가정 수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나는 다시 시설에 등록된 후원자, 자원봉사자들에게 ‘봉사 시간을 드린다,’는 내용을 포함하여 편지를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띄었다. 며칠 후 나를 찾는 전화가 왔었다. 그분은 강남지구 학부모 봉사단장님이셨다. 그 인연으로 몇 년간 지하철 및 가정문화체험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사업을 진행하면서 많은 에피소드가 많았다. 지하철을 탔을 때 시민들이 ‘재수 없다며 당장 내리라’고 소리 지른 아저씨, 가정문화 체험하는 집이 낯설어 꼴딱 밤을 새운 장애인, 지하철이 생소하여 탑승을 거부한 장애인, 이불에 지도를 그리는 바람에 도우미 교사가 한밤중에 이불을 빤 사연들이 지금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것을 계기로 전원은 아니지만, 소수 인원들이 기차, 택시, 비행기를 타 볼 수 있는 기회들이 생겼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시설에 있는 장애인들이 모두 다 해외여행을 가보는 게 소원이다. 언제 가는 '이루어지리라'하며 기대를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