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글들을 한참 읽어 보던 여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런 내용은 안 쓰면 안 돼?"
"왜?"
"나중에 뚱뚱이들이 커서 볼 수도 있잖아. 당신 기준엔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나도 나름 열심히 도와준다고 한단 말이야. 가끔은 칭찬도 좀 해줘."
듣고 보니 내가 쓴 글에서 여비의 존재감은 매우 적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여름을 맞이한 에어컨 같다. 항상 그 자리에 있지만 꼭 필요할 때는 수리가 필요한 에어컨처럼 그는 꼭 필요할 때 부재중인 남자였던 것이다. 나와 쌍둥이들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고는 있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여비를 위한 헌정코너를 준비했다
쌍둥이들의 아빠이자 내 남편인 여비와는 '거미의 숲' 3시 방향에서 처음 만났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지". '거미의 숲'은 리니지를 하는 사람이라면 단 번에 알 수 있는 핫플레이스다. 나는 무과금유저이면서도 랭커자리를 유지했던 지독한 노가다꾼이었고, 여비는 과금을 했지만 레벨은 낮은 센 것도 약한 것도 아닌 특이한 유저였다. 나는 기본으로 보급되는 희귀 캐릭터로 효율적인 사냥터와 효율적인 사냥 방법을 연구하여 최대 이익을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사냥을 했다. 실제로 엑셀을 사용하여 위치별 획득 경험치 비교 분석까지 하였다. 분석과 연구를 마친 나의 캐릭터는 남들과는 다른 속도로 폭풍 성장했고, 종종 매크로(불법 자동 사냥 프로그램)을 돌린다는 오해까지 받아 신고를 받기도 했다. 반면에 현질로 얻어낸 영웅 캐릭터, 반지, 영웅 인형까지 동반한 (희귀 <영웅 <전설 <신화) 여비는 효율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자동사냥만 돌리며 전쟁을 일삼던 유저였다. 좋은 등급, 좋은 장비도 중요하지만 레벨 1 차이가 굉장히 중요한 리니지 특성상 5 레밸 이상 차이 났던 우리는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정반대의 성향이었던 여비와 나는 우연히 만나 필드를 돌며 데이트(?)를 하고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애정을 키워갔다. 지금은 공성전이 아닌 육아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필드를 누비던 그 시절이 아직도 그립다.
여비는 필드 대신 한 시간 거리의 회사로 출퇴근한다. ESTJ인 여비는 단순하고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뼛속까지 경영자 마인드의 소유자이다. 회사에서는 능력 있고 모범적인 상사일지 모르지만 집에서는 세 모녀 사이의 천덕꾸러기에 불과하다. 코로나검사기의 두 줄을 보고 축하의 눈물을 흘리는 허당 중의 허당이다. 이 허당이 회사에서는 일반 직원이 아니라 임원이다. 평소 그의 언행을 보면 직원들의 사랑을 받는 상사는 못 될 것 같다. 물론 임원이라고 해서 좋은 점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제외하면 하나도 없다. 물론 남들은 눈치 보느라 쓰지 못하는 연차를 맘대로 쓸 수는 있다. 그러나, 일반 직원들과는 달리 프로젝트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크고 일이 많아 연차는커녕 (수당 없는) 야근과 주말 출근을 밥 먹듯이 한다. 심지어 거래처 대표와의 술자리는 기본이고 임원진 미팅, 임원진 회식, 임원진 골프여행, 워크숍 등등 빠질 수 없는 자리가 많아도 너무 많다. 물론 빠지려면 얼마든지 빠질 수는 있겠지만 회사의 이익과 직원관리 차원에서 참석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나도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한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그동안(임신 중, 출산 후 쌍둥이들이 어렸을 때) 여비는 가능하면 이러한 자리를 피했다. 특히 임신 중에는 입덧을 심하게 하는 나를 위해 칼같이 퇴근한 후 집안 청소부터 쓰레기 버리기까지 각종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특식으로 고기까지 구워주곤 했다. 물론 그의 스테이크는 너무 질겨 아무리 씹어도 씹히지 않았지만, 정성이 기특해서 격한 리액션과 함께 꿀꺽 삼키곤 했다. 고위험 산모였던 나는 입원을 밥 먹듯 했었고 그때마다 여비는 퇴근 후에 들러서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다 주며 하루에 한 번 얼굴을 보여주고 갔다. 출산 후 한 달 동안은 조리원과 신생아 중환자실을 매일 왔다 갔다 하며 내가 하루동안 짜 놓은 신선한 모유를 배달했다. 조리원 퇴소 후에는 1시간 간격으로 일어나서 모유수축과 육아를 하는 나를 조금이라도 더 재우기 위해 밤샘육아에 동참했다. 쌍둥이 육아는 정말 힘들다.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쌍둥이를 낳을 생각을 쉽게 하지 말자. 그 힘든 시절을 거쳐 육퇴가 가능한 지금에 이르렀고 이제는 여비도 회사와 본인에게 시간을 할애하기 시작했다.
여비는 중요한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한 달 정도 주말을 반납하며 일을 한다. 문제는 그 타이밍이 항상 최악이라는 것이다. 이번 달만 해도 그렇다.
9월 초에 마무리해야 하는 업무가 있어서 8월 한 달 내내 여비는 주말에도 출근을 해야 했다. 문제는 8월 중순에 내가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쌍둥이들까지 구내염, 결막염, 감기, 아데노 바이러스로 한 달 동안 무려 4번이나 아팠다. 그 와중에 여비는 퇴사하는 직원을 위한 회식도 참석하고 거래처 대표와의 술자리, 친한 형님의 생일파티까지 참석했다. 중간에 외증조 할아버지의 생신도 있었지만 일이 바빠 가지 못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여비 덕분에 나는 아픈 몸으로 아픈 아이들을 보살펴야 했다. 8월은 나에게 있어서 괴롭고도 외로운 한 달이었다. 두둑한 월급도 좋지만 그보다는 나와 많은 시간을 함께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비가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나는 한 없이 게으름을 부린다. 이제는 도가 튼 쌍둥이 육아이기에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힘든 일은 여비에게 떠밀고 나는 뒤로 빠지는 것이다. 나에게 할당된 임무는 주로 주방 관련 업무로 아이들이 먹고 난 음식폭탄 정리 및 설거지가 해당된다. 사실상 힘든 일로 분류되어 마땅한 일들이지만, 여비에게 음식 폭탄으로 초토화된 바닥 청소를 부탁했다가 깜짝 놀란 이후 다시는 여비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날도 쌍둥이들은 밥, 반찬, 동치미 국물등이 가득한 식판을 뒤집어 바닥을 어지럽혔었다. 식사를 먼저 끝낸 여비가 청소를 도와주겠다며 선뜻 나섰다. 그러나 여비의 청소방식을 본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름 아닌 마른 휴지로 음식물들을 모아 버린 후 물티슈로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휴지와 물티슈는 걸레만큼 깨끗하게 닦이지 않을뿐더러 환경오염 문제의 심각성 때문에 비건생활까지 하는 극성스러운 여자인 나에게 그 행위는 혐오스러운 자원낭비였다. 심지어 마른 휴지라니! 음식물을 꼬옥 감싼 그 휴지는 당연히 일반쓰레기로 분류되었다. 걸레와 행주 사용을 추천하는 나에게 그는 걸레 빠는데 드는 물이 더 낭비라고 말한다. 아, 그런가? 그 생각은 못했네. 어쨌든 나는 행주와 걸레가 편하다. 이후 주방일은 내가 담당하고 그 외 청소, 쓰레기 버리기, 목욕, 육아, 치카 등은 여비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글로 쓰고 보니 매우 부당해 보인다. 독박육아에 대한 보상을 이렇게 받으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심보가 비뚤어졌음이 분명합니다. 죄송합니다.
깔끔하기는 또 어찌나 깔끔한지 시어머니조차 하지 않는 시집살이를 그가 대신한다. 바닥의 머리카락은 어째서 그의 눈에만 보이는지. 냉장고 속 음식들엔 왜 이리 관심이 많은지. 유통기한에는 또 왜 이리 예민하고 잔소리는 끊이지 않는 건지... 말없이 치워 줄 생각이 없다면 이제 그만 집안일에 관심을 꺼 줬으면 좋겠다. 육아에 지쳐 씻는 것이 숙제인 나와는 달리 여비는 매일 씻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주 씻지 않는 나의 베개보다 매일 씻는 여비의 베개에서 나는 냄새가 더 지독하다. 호르몬의 힘이지만 이긴 기분이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여비에게 육아를 부탁하면 으레 아빠들이 그렇듯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영상통화가 시작된다. 통화가 끝나면 각종 삼촌, 이모, 언니, 오빠 등을 총동원해서 영상통화를 이어간다. 설거지가 끝나면 쌍둥이들을 차례로 씻긴 후 자러 들어간다. 나는 아이를 재우다가 먼저 잠이 들고 여비는 자유시간을 얻는다. 이렇게 여비가 일찍 퇴근한 날에는 소재거리 하나 없이 평범하고 지루하게 하루가 마무리된다. 그러니 나의 글 속에서 그의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져 가기 마련이다.
헌정코너라고 시작해 놓고 뒷담화로 마무리 된 「여비 스페셜」... 2탄을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