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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에 Dec 07. 2020

그래, 저주받은 게 틀림없어

그러니 옷장을 정리하자

 학교에서 주관하는 여름 방학 프로그램에 참여했기 때문에 1달이란 시간은 정말이지 똑 떨어졌다. 마음 같아선 미국에 더 있고 싶었지만 다음 학기를 등록하지 않으면 꽤나 큰 금액의 장학금이 취소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귀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렇게 돌아온 바로 다음 날 한 학기를 시작했는데, 그 어안이 벙벙함을 잊을 수 없다. 고작 한 달 미국에 있었다고 한동안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부딪히는 것이 불편하고 나도 모르게 Sorry라고 말하는 스스로를 한편으론 가증스럽다고 느껴 헛웃음을 지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날 찍었던 서울의 낮과 밤

 이상하게도 돌아온 날부터 내 방에 그리미(그리마, 돈벌레)가 출몰하기 시작했다. 엄청 큰 아이들로. 그것도 하루가 멀다 하게. 괜히 이상한 느낌에 자다 깨서 불을 켜보면 손바닥 만한 그리미가 모기장을 타고 들어와 내 머리 바로 위에 붙어있었다든가, 한 마리를 발견하면 바로 옆에서 비슷한 크기의 그리미를 발견하고 두 번 소리를 지른다던가 하는 지금 생각해도 비현실적인 일들이 계속됐다.


서울에 온 것은 잘못이라고 하늘이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누군가 저주를 건 걸까. 그렇지 않고선 설명되지 않는 일들의 연속에 나중에 가서 나는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또야?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일이? 허헣.’


계속 창작을 하는 것에 대한 답을 얻고자 떠났던 미국에서 아무런 답도 들고 오지 못한 채로 영화를 만들어야 했기에 열심히 하되 열심을 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양가감정이 나를 항상 따라다녔다.


 영화를 찍는 과정은 복기하는 것이 괴로워 생략하기로 하겠다. 하지만 정말 속상한 일에는 울 수 없어서 대신에 이상한 포인트에서 정말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미안하고 고마운 일들도 사고도, 창피한 일들도 참 많았다.

미국에 가는구나 하고 신나서 칠했던 발톱

 그 와중에 사랑하는 할아버지는 내가 미국에서 돌아오자 새벽에 응급실에 실려가시기도 했고 나는 새벽에 병원에 갔다가 다음날 아무도 없는 학교에 돌아가 영화를 만들고 급격히 안좋아진 피부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오늘은 누구와 몇 마디를 나눴더라를 세며 하루를 지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아빠도 할아버지와 똑같은 무서운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아빠가 돌아가시면 장례식장에 누가 와줄까 나는 누구에게 기대서 울까. 아무도 없기에 울면 안될 것 같았다.


 그 시간들에 쓰는 것에 대해 몇번을 망설이다가 줄이고 줄여 쓰고자 노력한다. 어떻게 하면 그 긴 시간을 압축해서 쓸까. 휙 하고 넘겨버리고 즐거운 이야기를 다시 쓸까.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가 듣기 싫을 것이다. 나 또한 얼굴을 알 수 없는 읽는 이들의 마음이 걱정되어 짧게 줄여 쓰고자 노력한다.  

99년 만의 개기일식이 있던 해에 미국에 간 것은 운명이었다고 조금 유치하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비록 필카로는 담지 못했지만  대낮에 어두워져 가로등이 켜지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는 그 해 겨울은 이상하게 춥고 모두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해에 한 사람이 그를 사랑해주던 많은 사람들의 곁을 떠났다. 영화를 찍느라 바빴던 나는 실시간 검색어에 그의 이름이 뜬 것을 확인하고선, 신곡이 나왔나 보네. 솔로곡 몇 개 좋았는데 나중에 한번 들어봐야겠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검색어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소식을 알게 돼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로도 나는 알지도 못하는 그에 대한 생각을 영화를 마무리하면서 참 많이 했다. 그 생각들 마저도 나의 투사이자 투영일 뿐이겠지만. 


그 후로 누군가 만든 것이 좋다고 느끼거나 누군가의 어떤 것이 좋다고 느끼면 무리해서라도 표현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에게도 그런 말이 필요했던 것일까 혼자서 생각해보면서. 왜냐면 나는 남몰래 그의 음악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나의 것이 아니어도 그런 작은 진심 어린 마음이 닿았더라면 그도 잠깐은 숨통이 트이지 않았을까?라는 제멋대로의 생각을 했기 때문에.


 제멋대로의 생각일 수밖에 없는 것이 미안하고, 이 미안함의 출처도 결국 나에 관한 것이기에 미안하고 미안하고. 날이 추워지면 가끔 떠올리는 사람이 된 그는 나에게 누군가에게 좋아요, 멋져요 라는 말을 최선을 다해서 전하게 만들어 주었다.

저것을 개기일식이랍시고 담았느냐

 힘겹게 찍은 영화는 학교 영화제에 올라갔다. 영화제에 올라가는 것은 그래도 꽤나 큰 일인데 이상하게 그 해에는 모든 것이 조금 많이 달랐다. 모든 것이 끝난 한 학기의 뒤풀이 자리에 참석한 전임교수는 영화제에 올라간 모든 연출자들을 불러 술을 따라주면서도 나만은 부르지 않았다.


 이가 갈렸지만 나 말고는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방학 후 전기장판에 녹듯이 누워있던 나는 어느 날 문득 옷장을 정리하자는 생각이 들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계속해서 나오던 그리미가 오랫동안 치우지 않은 옷장 안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계속했기 때문이다.


 앞이 막힌 슬리퍼를 신고, 기다린 집게를 들고 에프킬라 두 통을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모자를 쓰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나는 영화 찍는다는 핑계로 더 난장판이 된 옷장을 헤집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부터 쓰던 가구기에 밑의 수납공간엔 오래된 참고서와 쇼핑백들이 보였다.


 소름 돋아하며 까치발로 옷장과 '대면'한 나는 내 옷장에 사실 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옷장 안은 그저 오래된 것들이 있을 뿐 생각보다 깨끗했다.그것이 어떤 경종을 울려 나는 새롭게 살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코난 오브라이언의 말이 떠올랐다.

All I ask is one thing, and I'm asking this particularly of young people: please don't be cynical. I hate cynicism, for the record, it's my least favorite quality and it doesn't lead anywhere. Nobody in life gets exactly what they thought they were going to get.
 냉소주의는 당신을 아무 곳으로도 이끌지 않는다.

 

열심인 것이 부끄러워 시니컬함으로 무장하고자 했던 나는 그것이 결국 나를 어느 곳으로도 이끌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영화를 찍는 태도와도 관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미국 할머니에게 이메일을 쓰는 것이 유일한 위로이던 그 추운 계절 나는 이대로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면 아마 4학년에 자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든 학교로만 돌아가지 않으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인턴을 지원했고 감사하게도 그곳에서 많은 것들이 바뀌는 경험을 한다.


 지금에서야 글과 함께 사진을 들춰보니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 영화와 인턴 생활로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하드를 탈탈 털어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사진들을 올려본다.


  이 어두운 시기의 기억들은 훗날 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안겨주진 않았다. 오히려 적당할 때 그만두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든다. 다만, 성인이 된 후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며 나는 너무 약한 사람이라고 되뇌던 그 속삭임을 멈출 수 있게 해 줬다.


항상 누군가에 의해 평가받는 영화라는 것을 만들면서 나만의 생각을 가지는 것이 항상 어려웠다. 좋아해줬음 싶었기에.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인정도 필요없이 '나는 강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그리미 덤벼, 하고 옷장 문을 열 수 있었던 그때부터 아마 나는 전보다 강해졌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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