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비치는 곳에, 그대도 있을까요?
윤희에게
달빛이 비치는 곳에, 그대도 있을까요?
나는 소수자에 대해서 다룬 영화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런 영화들은 영화 내의 이야기와 함께 소수자에 대한 서사를 같이 다뤄야 하기에 만들기가 쉽지 않지만, 잘 만들어진다면 명작인 경우가 많고, 또한 영화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기에 소수자를 다룬 영화를 곧잘 찾아보는 편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어느 가족>, <문라이트> 같은 영화들은 그런 영화들 중에서도 참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영화들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은 볼 때마다 항상 따뜻한 보다는 냉철한 시선이 먼저 앞서는 영화들이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에 <윤희에게>를 보면서 깨달았다. 소수자를 다룬 영화이면서도, 이렇게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영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만월에서 윤희에게 까지
나는 이 영화를 극장 정식 개봉 이전에, 블라인드 시사회로 접했다. 블라인드 시사회로 보았을 때의 제목은 만월이었다. 감독이 누군지, 배우가 누군지, 어떤 영화인지 정말 하나도 모르고 영화를 보았는데, 그렇게 영화를 본 건 처음이었고, 정말 신선한 경험이면서 좋은 영화를 만날 수 있는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영화가 끝나고, 간단한 설문조사를 하면서 영화의 제목을 무엇으로 바꾸면 좋을지를 물어보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윤희라는 이름이 들어간 제목이 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적었고, 최종적으로 개봉했을 때는 <윤희에게>라는 제목으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이 제목이 마음에 든다. 만월보다는 윤희에게가 더 이 영화에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윤희는 주는 것보다,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을 수 있는 영화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따뜻하다. 사실 요 근래에 본 영화 중에서 이토록이나 따뜻한 시선을 견지하는 영화가 있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보는 사람에게 불편함을 선사해주지 않는 영화였다. 이건 사실 정말 대단한 건데, 소수자를 다루는 영화에서 불편함을 뽑아내지 않고 영화를 만드는 건 정말 드물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필연적으로 소수자를 다루게 된다면, 그 소수자를 반대하는 사람들 또는 그 소수자들의 입장에 찬성하거나 자기가 그 소수자의 입장이 되는 사람들, 둘 다를 만족시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어느 한쪽은 불편함을 느끼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그 불편함을 거의 만들어내지 않으면서도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미화 없이, 과장 없이 담아내고 있다. 거기에 소수자 중에서도 퀴어, 여성 퀴어를 다룬 영화를 남자 감독인 임대형 감독이 맡았음에도, 그 섬세함 감정 선이나 주인공들의 심경변화를 아주 세심하게 연출해냈다. 약간의 편견일 수는 있겠지만, 여성 캐릭터의 감정 선이나 심경을 남자 감독이 세심하게 캐치해냈다는 부분에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임대형 감독이 <82년생 김지영>을 연출했다면 아마 남녀 모두에게서 더 많은 공감을 받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결정적인 두 장면
윤희에게의 스토리 자체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 일견 이런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스토리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면 장면에서, 이 영화만의 특별한 따뜻함과 색깔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두 장면으로 이런 부분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윤희의 전 남편이 윤희에게 자신의 재혼을 말하는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윤희는 동성애자로 나온다. 그런 그녀가 결혼을 했다면, 그 결혼은 그렇게 긍정적인 결혼은 아닐 것이라는 걸 아마 많은 사람들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혼을 했다. 이런 관계를 창작물에서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한쪽을 악역으로 만드는 것이다. 억지로 결혼을 한 윤희는 피해자가 되고, 그녀에게 결혼을 강요한 남편 또는 가족들은 악역이 된다. 아주 쉬운 전개이면서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전개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전개를 이용하지 않는다.
이성애자와 결혼하게 된 동성애자는 불행할 것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하고, 평생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 테니. 하지만 반대로, 동성애자와 결혼하게 된 이성애자도 역시 불행할 것이다. 함께 평생을 살아갈 사람이 자신을 절대로 사랑하지 않고, 앞으로 사랑할 일도 없을 테니까. 나는 한 번도 이 상황을 반대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관계에서 항상 피해자는 동성애자 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성애자도 그 관계에서는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자기를 평생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과 살아야 한다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을 테니까.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역지사지를 아주 잘 표현한다. 윤희의 전 남편이 딸에게 엄마와 왜 헤어졌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할 때, ‘네 엄마는 같이 있는 사람을 외롭게 만들어’라고 말한다. 윤희가 외롭고 힘든 만큼, 그도 아마 외롭고 힘들었을 것이다.
다시 장면으로 돌아와서, 전 남편이 윤희에게 청첩장을 줄 때 그는 눈물을 터트린다. 그리고 윤희는 그런 그를 토닥여준다. 나는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영화 안에서 표현되지 못한 해묵은 갈등과 원망과 슬픔이 해소되었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함과 분노, 슬픔, 가지고 있던 모든 감정을 눈물과 토닥임에서 떨쳐냈다고. 그러면서 보는 이들에게 전혀 불편하지 않게, 오히려 따뜻한 감정을 선물해준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치유를 선물해주었다.
두 번째 장면은 일본에 있는 윤희의 친구가 보여주는 장면이다. 윤희의 친구는 윤희와 서로 사랑했던 동성애자로,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고 수의사라는 번듯한 직업을 가진 채로 살고 있다. 안정적인 직업과 삶을 소유하고 있는 그녀는, 일견 행복해 보인다. 그런 그녀에게 병원의 손님으로 왔던 한 여성이 사랑을 고백하게 되고, 그 고백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있는 힘껏 숨기라고, 그 감정을 드러내지 마라고’. 이 장면 이전까지의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나름 괜찮은 삶을 살아오고, 결혼하라는 주변의 압박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삶, 여유가 있는 삶을 살아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대사 하나로, 사실 그녀도 윤희와의 이별을 견디기 위해 너무나 큰 고통을 감내했고, 그 이후로 자신을 잘 숨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장면 이전까지 나는 이 영화가 퀴어영화라는 것을 몰랐다. 하지만 이 장면 한 번으로 이 영화는 퀴어 영화의 색깔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거기에 더해서, 소수자를 다룬 영화는 마냥 따뜻하다기보다는 그 안에서도 소수자 문제를 짚고 넘어가는 날카로운 창 한 자루가 필요한데, 나는 이 장면, 이 대사가 그런 역할을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마냥 따뜻한 겨울날의 동화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을 비추는 영화라는 것을. 하지만 그 날카로움마저도 그렇게 차가운 날카로움이 아닌 따뜻한 날카로움이다. 상처가 아물고 남은 딱지를 떼어내야 비로소 새살이 완벽하게 모습을 보인다.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딱지를 벗겨내고 새살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그런 날카로움이 아니었나 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으로 이 영화는 퀴어 영화임을 확실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소수자가 아닌 사람과 소수자인 사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얘기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에는 윤희들
나는 이 영화가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따뜻한 힐링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팬덤을 윤희들, 또는 만월단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혹시 이번 크리스마스에 할 일이 없다면, 모두 윤희들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