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딸과의 대화
첫째 딸아이가 2학년일 때 일이다. 사교성이 남달라 어디서나 친구관계가 좋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혼자 노는 날이 잦아졌다. 너무 톰보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밝고 쾌활하던 아이가 잔뜩 풀이 죽어서는 “엄마, 오늘도 쉬는 시간에 혼자 놀았어요.” 하고 오는 것이었다. 처음엔 별 일 아니다 싶어 “혼자 노는 날도 괜찮아. 오늘은 친구들이 다른 게 하고 싶었나 보다.” 하고 가볍게 받아주었다. 그런데, 그런 날이 자주 생기자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가 혹시 친구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진 않는지, 내가 뭘 잘못 가르친 건지 싶어 아이를 앉혀 놓고 친구들에게 잘하라고 잔소리를 했다. 아이는 친구와 못 논 것도 속상한데, 엄마가 마치 자기가 잘못했다는 듯이 말을 하는 게 서운한 듯했다. 몇몇 친구들을 초대해 놀이시간도 만들어 주고, 키즈카페도 데리고 가 보았다. 그럴 땐 둘도 없는 친구들처럼 잘 놀았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아이는 또 풀이 죽어 오곤 했다. 장난기 많고 환하게 웃던 아이는 점점 말이 없고 조용한 아이로 변해 가고 있었다. 주변 엄마들에게 물어보니, 여자아이들은 빠르면 2학년 정도부터 성격이 차분해지는데, 좋은 거라고 했다. 말이 없어지는 게 좋은 것이라니, 나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과 학교 카운슬러를 찾아가 의논해 보았다. 초등학교 2학년 여자 아이들 사이 흔히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 나이부터 ‘관계’나 ‘힘의 논리’와 같은 어른들의 사고가 시작된다고 했다. 생일이 몇 달 빠른 아이들이 대장 노릇을 하며 아직 덜 자란 아이들을 ‘부리는’ 일도 자주 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지만, 요즘 아이들이 워낙 영리하고 또 아직은 아이인지라 강약 조절이 부족한 탓에 어떤 경우는 말이나 따돌림등으로 친구에게 큰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청소년들처럼 ‘집단왕따’ 같은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들에게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때가 되면 딸엄마와 아들엄마의 차이가 확실히 난다. 딸아이들의 미묘한 감정기복에 따라 엄마들의 관계도 영향을 받는다. 같은 여자지만 여자의 마음은 어찌 그리 깊고 복잡한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반면 남자아이들은 이 시기에도 아직 어린이들이다. 친했던 아들엄마 말에 따르면, “남자애들은 축구공 하나 던져주면 그냥 잘 놀아”라고 했다. 고민하는 나에게 카운슬러 선생님은 소장하신 교재를 주며 ‘친구’에 대해 아이와 대화를 나누어 보라고 했다. 지금이 아이에게 올바른 기준을 알려줄 적기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후 몇 주간 아이와 매일 30분씩 ‘친구’ 교재를 가지고 이야기했다.
“우리 주변엔 3종류의 친구가 있단다. 편의상 1,2,3번 친구라고 하자꾸나. 1번 친구는 진짜 친구야. 이 친구와 있을 땐 항상 기분이 좋단다. 친구가 너를 응원하고 네 의견을 존중하기 때문이지. 의견이 다를 때도 기분 나쁘지 않게 이야기하는 친구야. 우린 이런 친구를 만나고 싶어 하지. 다음은 2번 친구란다. 이 친구는 어떤 날은 정말 친한 것처럼 행동하다가 또 어떤 날은 갑자기 냉정해지는 면이 있어. 자기 기분 때문일 때도 있고 이유를 모를 때도 있단다. 그래서 2번 친구는 너를 불안하게 하지. 우린 이런 친구와는 조금 거리를 두어야 해. 또 언제 맘이 바뀌어서 너에게 상처를 줄지 모르니까 말이야. 하지만 아직은 포기하지 말자. 2번 친구가 1번이 될 수도, 3번이 될 수도 있거든. 마지막으로 3번 친구는 가까이 지내지 않아도 되는 친구야. 친구라고 하면서 자꾸 너에게 미운 말을 하거나 너를 속상하게 하는 친구란다. 이런 친구는 질투가 많아. 네가 칭찬을 받거나 상을 타면 속이 상해서 너에게 심술을 부리기도 하지. 그런 친구는 친구가 아니야. 그냥 ‘같은 반 아이’ 정도로 하자. 앞으로 우리 OO이는 1번 친구를 만나려고 노력해야 해. 그러려면 우선 너부터 1번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하는 거야.”
어려운 내용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아이와의 대화는 잘 진행되었다. 아마도 그동안 아이도 친구 관계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많았던 듯했다. 대화 중간에 “나 그런 애 알아. 우리 반 지유가 그래 엄마. 지난주에는 내가 제일 좋다고 나랑만 놀 거라고 했다가 갑자기 나랑 말도 안 하고 다른 애들이랑만 놀아.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서 궁금했는데, 지유는 그럼 2번 친구인 거네?”라고 했다. 또, “재은이는 1번이야. 재은이는 항상 나를 보면 웃으며 인사해. 술래잡기 할 때도 다른 애가 반칙하는 거 보고 내 편 들어줬어.”라고도 했다. 나는 말했다. “그렇네. 근데 친구가 1번인지 2번인지 알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지? 처음 보고는 서로 몇 번 친구인지 알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OO도 지금은 친구를 알아가는 시간인 거네. 1번 친구 찾기 시간.” 아이가 물었다. “엄마, 이전까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모든 친구들과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고 했었잖아.” 나는 말했다. “맞아. 그런데, 어른들도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긴 힘들어.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거든”. “그럼 3번 친구는 어떻게 해? 친구가 아니니까 나도 같이 미워해도 돼?” “아니, 친구가 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해도 되는 건 아니야. 그냥 ‘같은 반 아이’니까 딱 그 정도로만 대해주면 돼. 같은 반 남자친구들이랑 같이 놀진 않지만 미운 말 하지 않는 것처럼.”
아이는 자기만의 실험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 후로도 혼자 노는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전처럼 우울해하진 않았다. 학년이 바뀌고 3학년이 되어 자기와 죽이 잘 맞는 친구가 생겼을 땐 너무나 기뻐하며 그 관계를 소중히 다루려 했다. 지금 중학생이 된 우리 큰 아이는 친구관계가 정말 좋다. 원래의 성향대로 늘 환하게 웃고 조잘조잘 말도 많이 한다. 아이가 자란 것도 있고, 그 사이 친구 관계로 다양한 경험을 한 것도 있다. 그때 조언해 준 카운슬러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딸아이들 친구관계 때문에 눈물짓는 많은 엄마들이 한 번쯤 시도해 봐도 좋을 대화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