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을 읽고 (feat. 의식의 흐름)
어느 날, 그냥 심심해서 인터넷에 있는 성격 테스트를 해봤는데, 제 성격을 설명하는 내용 중 하나가 유난히 눈에 거슬렸어요. '주부인 경우, 살림하기 힘들어한다.'라는 문장이었죠. 처음엔 눈에 거슬리기보다는 살짝 실소를 머금었던 것 같네요. 왜 그랬는지 곰곰이 돌이켜보니, 나도 미처 인식하지 못한 내 심연에서 '여자는 살림을 잘해야 한다.' 라는 명제가 놓여 있었나 봅니다. 그러니까, 나는 '여자'이지만, 살림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 들통난 것 만 같은(?) 아 이런. 나의 이 부족한 생각을 빨리 지워버려야겠어요. 따지고 보면, 아내만 살림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살림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왜 '주부=살림' 인가요?
그리고 또, 다소 화나게 한 문장이 있었어요. 나와 다소 반대의 성향을 가진 지인의 성격 결과 중에 있던 문장이었죠. 거기엔 '현모양처 감이다.'라고 언급되어있었어요. 이런. 젠장. 기혼 여성에게 요구되는 전형적인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인, '현모양처!' 근대에 들어서 현모양처 사상을 통해 가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상승하였지만, 주체적 존재로서의 여성 지위가 상승된 것은 아니었죠.
그러니까 여성을 ‘가정’에만 제한하는 구조였고, 여성이 주체성을 가지고 체제를 뒤흔들 만큼의 힘을 지니지 못하게 만든 사상이라는 것! 1960년대 이후 본격적인 공업 자본주의화 과정을 거치면서 여성은 경제 생산에 참여하는 남성 가장을 위하여 가정에 남아 가사노동(=살림)을 하고 정서적 위안을 주는 아내로, 그리고 '출세할' 자녀를 기르고 교육시키는 일에 몰두하게 된 거라고. 어떻게 보면, 이때가 '헬리콥터 맘’ 탄생 시초가 아니었나 싶어요. 이렇게 해야만 인정을 해주니까요.
이렇게 얘기를 꺼내어놓다 보니, 내가 알고 있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 살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얘기해보고 싶군요.
어떤 여인은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는데, 집안에서 "너는 여자인데, 무슨 공부냐. 오빠들 뒷바라지나 하거라."는 부모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며 세월을 보냈어요. 그 여인은 지금 너무 나이가 들어버렸고, 단기 기억증을 앓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한글이나 숫자만 보면 배우고 싶다하시며, 그와 관련된 퍼즐 활동을 열심히 하세요. 전 그 모습이 귀엽다가도, 괜스레 짠해지기도 해요. 왜 이럴까요.
어떤 여인은 부잣집 딸이었어요. 일제강점기에 학교에서 일어를 배울 정도로 공부를 할 수 있었죠. 그만큼 집안에서 지원을 할 수 있었던 상태였던 것인데요. 당시, 그 여인의 아버지는 일본에 쌀을 파는 아주 큰 장사를 하셨고, 그 지역에서 제일 잘 나가던 부자로 성공했었어요.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죠. 무튼, 자녀들에게 학업 지원을 할 수 있는 부를 가진 집안이었어요. 그렇게 그 집안의 딸은 다른 여성에 비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던 거죠. 하지만, 당시 여자라는 이유로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며, 부모님이 알맞은 신랑감을 찾아 혼례를 치르자고 부추겼답니다. 그 여인은 혼인은 하기 싫고 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시대가 그러했으니, 어쩔 수 없이 원치 않은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물론, 각자 처한 집안 환경은 달랐지만, 전통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외출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고, 복종과 인내만을 배워야 했던 것은 변함없는 진실이죠. 이렇게 살아야만 했던 여성이 전통사회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시기가 바로 '현모양처' 사상이 전개되면서부터고요.
그렇다면, 이 때는 바로 우리 어머니 세대 즉, 베이비부머 세대의 여성 이야기가 나오겠군요. 그래요. 그 세대의 한 여성 이야기를 꺼내볼게요. 아주 아주 옛날에 비해서는 여성의 지위가 상승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 혼자 독립적인 주체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지진 못했어요. 여성이 그나마 사회에서 안전하게 살기 위해선 '결혼'이라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 당시 사회에서 멋진 아내로, 멋진 여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교육시킬 수밖에 없었어요. 사회에서 그런 여성의 역할을 만들어내 주입했으니, 그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었죠. 하... 하지만, 그 여인은 지금의 딸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남자의 경제력에 기대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전문적인 일을 하는 여성이 되라고요. 결코 그 여인의 모든 삶이 불행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자기 자신을 잃고 살았던 순간들을 떠올릴 때마다 딸에게 그렇게 얘기하곤 했답니다.
한 여인은 딸만 넷인 딸 부잣집의 엄마이자 아내이자 며느리입니다. 딸을 낳을 때마다 시어머니의 핀잔을 들으며 엄청난 시집살이를 당했다고 해요. 딸이 뭐가 될 수 있냐고, 여자가 뭘 할 수 있냐면서 말이죠. 그 여인은 너무너무 분해서 딸이, 여자가 웬만한 남자보다 더 잘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딸들에 대한 교육열이 엄청났고, 자기의 한과 욕심을 엄청 풀었습니다. 그런데, 딸들도 어머니의 고생을 아는지라 어느 하나 반항하지 않고 착실하게 했다네요. 그래서 그 딸들은 모두 다 잘되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남들이 인정할 만한 대학을 간 딸이 너무 힘들어한다는 거예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지만, 엄마를 위해서 참았다고 합니다. 사회가 개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까지 모자라 조정을 해버린다는 것... 언제까지 서로에게 아픔을 전가해야 할까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작품을 읽었다. 남성들이 말하고 쓴, 지어진 여성이 아닌, 정말 실재(제)의 여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버지니아 울프. 그의 '여성과 픽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자연스레.. 내가 듣고, 읽고, 경험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다 각자의 사연이 있지만, 환경은 하나같이 여자라는 이유로 제한당하고 핍박당했다. 제일 가슴 아픈 건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획일화돼있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제한해서 그걸 이용한 것. 이젠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몇몇 사연들로 여성의 삶을 일반화하고자 꺼낸 얘긴 아니다.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여성과 픽션' 이야기를 들으며 그와 연결되고 싶었다. 그래서 내 경험과 생각이 빚어낸, 픽션과 논픽션의 줄다리기 속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얘기할 수 있는 '여성과 픽션' 이야기를 '의식의 흐름' 대로 적어보고 싶었다.
여자의 입장에 대해서만 얘기한다고 불편해할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불편해도 할 수 없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기에, 이렇게라도 나는 계속 여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싶다. 특히, 여성 작가가 쓴 작품이라면 더욱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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