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 경장편 소설
사람이 살면서 가장 필요한 게 뭘까?
소꿉친구는 가끔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하루하루 별생각 없이 살아가는 하리에게는 일주일 내내 고민해도 답을 내리기 힘든 것들을 그는 가볍게 꺼냈다. 하리는 대답하기 민망할 때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되묻는 방법을 깨우쳤고 그럴 때마다 작은 웃음과 함께 선명한 눈빛이 닿았다.
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장소를 옮긴 세 사람은 점심시간이라 텅 빈 교실에 모여 앉았다.
“나는 기억이 있는 순간부터 귀신들을 봤어.”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하리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그냥 연기나 구름 같았는데 점점 선명해지고 소리도 들리는 거야.”
하리가 얼마나 오래 힘들었을지 상상할 수 있는 해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해주처럼 나도 병원도 여기저기 가봤고 유명한 교회랑 절도 가봤어.”
도희는 어린 하리가 통통한 뺨을 이리저리 돌리며 낯선 공간을 둘러보는 모습을 상 상하며 작게 웃었다. 하리의 눈빛은 서서히 추억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유치원 때부터 친한 친구가 있거든. 그 친구는 내가 귀신 보는 것도 가장 먼저 알았고….”
친구라는 개념을 이해한 시기부터 자신의 옆에 있던 아이. 하리의 짧다면 짧은 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존재였다.
“지금은 그냥 넘기지만, 예전에는 사람들이 내 얘기하는 거 진짜 싫어했는데 그래도 소문은 나니까 혼자 스트레스받고 있을 때 그 친구가 항상 나를 도와줬어.”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에게 하리보다 더 화를 내주고, 멋진 능력을 갖춘 거라며 마법 소녀 같다고 용기를 주곤 했다. 해주와 도희처럼 반짝이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던 눈빛을 떠올리면 언제나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나한테는 정말 가족만큼 소중한 친구였어.”
하리의 시선이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해주는 이 이야기의 끝이 결코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리에게 힘든 이야기를 하게 만든 건 아닌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무튼 그런 친구가 있었는데…. 중학생 때 사고가 났고 이맘때쯤 헤어지게 돼서 5월만 되면 기분이 좀 그래. 신경 쓰게 했다면 미안해.”
“그럼 그 친구는…….”
하리는 도희의 질문에 말없이 살짝 웃었다. 충분한 대답이었다. 말이 없어진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하리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단추 가져가는 거 정말 괜찮겠어? 다른 사람이 만든 거라 아무 일 없을 수도 있잖아.”
“그럼 아쉽지만 다행인 거지.”
“그러다 반장한테 더 안 좋은 일 생기면 어떡해?”
여전히 어두운 표정의 해주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교실로 들어온 지혜가 셋을 발견했다. 지혜는 반장의 단짝이었다. 아침부터 야자시간까지 붙어 다니는 사이였기에 분명히 무언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지혜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희 보건실 앞에서도 그렇고… 혹시 채은이 얘기하는 거면 나도 듣고 싶어.”
아까와는 달리 진정된 얼굴을 보고 하리와 시선을 교환한 도희가 단추를 내밀었다.
“이거 반장이 떨어뜨린 거야.”
“단추?”
“응. 반장이 단추 기도를 했나 봐.” -
지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나머지의 뜨거운 눈빛에 정신을 차렸다.
“일주일 전인가, 채은이가 소원을 이룰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걸 빌고 싶은지 물어봤었어.”
“그래서?”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고 했고… 채은이는 요즘 집안에 일이 좀 있어서 그걸 해결하고 싶다고 했어.”
늘 성실하고 밝은 채은에게 숨겨진 사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 사람이 숙연 해졌다. 당황한 지혜가 손사래를 치며 분위기를 바꿨다.
“아, 나도 정확한 건 모르는데 그렇게까지 심각한 건 아니랬어. 아무튼 평소에 귀신 얘기도 안 하고 신문에 나오는 띠 별 운세 같은 것도 안 믿는 애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까 좀 의아하긴 했지.”
그러던 채은이 갑자기 쓰러져 무척 놀랐는데 아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 서운한 마음에 다투게 되었다며 지혜가 울상이 되었다.
“채은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고 싶어. 아까 단추 기도라고 했지? 뭐라고 썼는지 볼 수 있어?”
넷은 머리를 맞대고 모여 앉아 책상 위에 놓인 단추를 노려봤다. 입술을 움찔거리던 해주가 다시 말을 하려는 찰나 점심 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지혜야. 반장 조퇴한다며, 걔 많이 아파?”
“어….”
지혜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아이들이 더 들어오기 전에 도희가 단추를 숨겼다. 딱딱한 감촉에 온기가 느껴졌는데 소름이 돋았다. 주머니에 들어간 단추의 무게감이 상당했다. 확실히 뭐가 있긴 한 것 같다며 슬그머니 기대감이 피어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단추에 있는 글자 말이야.”
해주가 자리로 돌아가며 하리에게 속삭였다.
“한자 같았어. 돌아갈 환.”
“한자? 이따가 확인해 보자.”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하리는 해주와 함께 도희 자리로 갔다. 복도로 나가자는 수신호와 함께 도희가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앞장섰다. 키는 작아도 확실히 활력이 넘쳤다. 해주는 알면 알수록 신기한 도희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감탄했다.
“해주가 단추에 적힌 거 한자 같대.”
“한자?”
“돌아갈 환이라고… 비슷하게 생긴 것 같아서. 아, 아닐 수도 있고!”
단추를 꺼내 이리저리 살피던 도희가 단추를 하리 손에 쥐여주었다.
“나 사물함에 옥편 있어. 가져올게.”
도희는 대답도 듣지 않고 교실로 뛰어 들어간 다음 하리가 단추를 더 살펴볼 시간도 없이 옥편을 들고 튀어나왔다. 하리는 잠시 도희가 게임 속 캐릭터 같다는 생각 을 했다.
“보자. 환… 환… 돌아갈 환… 아, 이거다.”
작은 옥편 속 더 작은 한자를 보기 위해 셋의 머리가 붙었다. 단추를 이리저리 돌려보니 얼추 비슷해 보였다.
“맞는 것 같은데? 이걸 왜 적은 거지?”
“뭐가 돌아오길 바라는 걸까?”
“사람? 물건?”
“어쨌든 소중한 걸 잃어버렸나 봐.”
해주의 결론에 하리와 도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당사자한테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네.”
“응. 일단 아까 말한 대로 오늘은 내가 갖고 있을게.”
도희가 단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의 하리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 숨을 삼켰다. 씩씩한 얼굴을 보니 절대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없애버려. 안전한 게 더 중요해.”
하교할 때 다시 조심하라고 말을 할 거라는 다짐이 티가 났는지 도희는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런 모습이 더 걱정되게 만드는 걸 알면서도 장난을 치는 듯했다. 결국 하리와 해주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내일 봐!”
평소처럼 힘차게 인사를 하고 어머니의 차에 올라탄 도희가 주머니 속 단추를 매만졌다. 확실히 재질에 비해 유난히 따뜻하다. 자신에게도 이상함이 느껴지는데 해주가 가져갔다면 정말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도희는 어깨를 으쓱였다. 잘 가져온 거야. 나도 내 몫을 다 할 수 있어.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은연중에 부족함을 느끼던 도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