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 경장편 소설
영혼들은 때로 말을 하는 대신 자신의 기억을 보여준다. 마치 당장 눈 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정말로 그들의 기억일까, 아니면 또다른 세계의 파편일까.
주먹을 꽉 쥐고 2층 복도에 서자 먼저 도착한 하리가 거울을 마주 보고 있었다. 단단히 각오했음에도 숨이 턱 막혔다.
“거울이 참….”
낡고 먼지투성이지만 어둠을 비추는 커다란 거울은 저택만큼 거대해 보였고 고압적이었다. 하리는 거울의 오염 때문에 귀신을 봤다고 착각할 수 있겠다며 살짝 열린 옆방을 힐끗거리는 해주를 붙잡아 세웠다.
“문이나 거울이 이쪽이랑 저쪽의 통로가 된다는 얘기 들어봤어?”
“응. 들어본 것 같아.”
여러 매체에서 종종 나오는 이야기였다. 어떤 것을 비추거나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는 것들은 현실과 비현실을 잇기 좋은 것들이었다.
자연스럽게 거울 앞에 선 해주가 눈앞의 자신을 쳐다봤다. 금방이라도 창백한 얼굴이 나타날 것 같았지만 등 뒤에 있는 하리의 존재감이 더 컸다. 해주는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왜 여기 있었어요?”
하리와 자신만을 비추는 거울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해주의 시선이 바빠졌다.
어디? 나는 안 보이는데? 순간 하리의 손이 해주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흠칫 몸을 떠는 해주를 껴안듯이 붙잡은 하리가 거의 속삭이는 수준으로 목소리를 줄였다. 물론 목소리가 향하는 대상은 해주가 아니었다. 흐릿한 거울 속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여자가 두 사람을 노려봤다. 쉬익, 바람 부는 소리가 귓가에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주…ㄱ…ㅇ…ㅓ….”
“뭐가 그렇게 속상해요?”
폭풍 속에 빠진 것처럼 귀를 찢는 잡음 때문에 해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여자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해주의 목에 여자의 손끝이 닿았고 평온하던 하리의 표정이 굳었다. 해주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구해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 으…주…ㄴ…ㅐ….”
해주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자신이 하리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앞에 유리 같은 것이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니 거울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 같았다. 바깥의 해주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눈을 까뒤집고 말을 쏟아내고 있었고 해주에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해주는 너무 비현실적인 상황에 아무런 감이 오지 않아 괜히 거울을 툭 치며 화풀이를 했다. 하리가 자신을 쳐다본 것 같았다. 두드리는 손에 힘을 줘 봤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를 돌려 주변을 살피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잡동사니 중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을 집어 들었다. 아까 계단에서 주운 것과 비슷한 장식이 달린 머리끈이었다. 유리로 된 장식 표면에 자신이 비치지 않아 묘한 기분이 든 것도 잠시, 해주가 눈을 감았다 뜨자 낯선 집 앞에 서 있었다. 자신은 옛날 디자인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손에는 아까 주운 머리끈이 그대로 들려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이 집은 그들이 들어 온 폐가였는데 잘 정돈되어 새집처럼 보였다. 집 안에서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미주야!”
깨끗한 문이 벌컥 열리고 튀어나온 누군가가 해주의 품에 안겼다. 해주 또래나 되었을까 마른 얼굴의 소녀가 해주에게 얼굴을 비비며 애정을 쏟아냈다.
“오늘은 조금 늦었네? 배는 안 고파?”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소녀는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잔머리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해주가 손에 든 머리끈을 내밀었다.
“응? 내꺼야? 비싸 보이는데….”
“괜찮아.”
해주의 입에서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주라는 인물의 시점으로 이곳이 폐가가 되기 전의 상황을 보게 된 것 같았다.
“해이, 오늘은 뭐 했어?”
해이라고 불린 소녀는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누렇게 바랜 흰색 셔츠와 밑단이 해진 치마는 유행이 한참 지나 보였다. 깨끗한 교복을 입은 상대방과 자신이 비교될 법도 한데 해이는 그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주고 간 소설책을 읽었어. 엄청 재미있어서 집안일을 하나도 못 할 뻔 했지 뭐야.”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미주가 머리를 가리키자 잠시 사라졌던 해이가 빗을 들고 돌아왔다. 확실히 해주에게 익숙한 모양새의 빗은 아니었다. 아마 한참 과거에 일어났던 일인 듯했다.
“내가 묶어줄게.”
“미주는 정말 친절해.”
미주는 약간의 사심을 담아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한 번 쓰다듬고 정성스럽게 머리카락을 빗어 곱게 땋아 내렸다. 반짝거리는 장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해이가 폴짝폴짝 뛰며 즐거워했다.
“다음에 올 때 다른 책도 빌려줄게.”
“정말? 너무 좋아!”
다시 한번 품에 안긴 해이가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잘 먹어서 볼살이 오른다면 더 보기 좋아질 낯이었다.
“미주야. 미주야. 근데 이제 여기 오면 안 돼. 너도 알잖아. 내일이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해주 자신의 것인지 미주라고 불린 소녀의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화도 나는 것 같았다. 미주는 화가 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왜 네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해?”
“울지마. 나는 괜찮아, 미주야. 이렇게 너도 만났고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이 정도면 행복했어.”
해이는 퍽 어른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도 의연하게 구는 태도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성공한다고 해도 다시는 볼 수 없잖아.”
“그래도 나는 의식이 꼭 성공하길 바라.”
단호한 대답에 한 번 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음. 그리고 미주 네가 나 같은 사람이 더 생기지 않게 모든 걸 끝내주면 좋겠어.”
주변은 고요해졌지만 해주의 마음속에는 천둥번개가 쏟아지고 있었다.
벼락 맞을 것들. 눈에 핏발이 서는 게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해이와 함께 떠나고 싶다. 의식 전에 자신이 크게 다치기라도 한다면 일이 미뤄지지 않을까. 험한 생각을 하는 것이 티가 났는지 해이의 마른 손이 뺨에 닿았다.
“미주야. 나쁜 생각 하지마. 날 위해서라도. 나는 너 때문에 살았는데 네가 위험해지면 내 마음이 어떻겠니.”
무력했다. 결국 내가 너를 죽게 만든 거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미주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어떻게든 막아야겠어.”
같이 죽게 되더라도.
“해주야!”
누군가 자신을 흔드는 손길에 눈을 뜨니 하리의 커다란 눈동자가 보였다. 끝났구나 싶어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곧이어 후드득 눈물이 쏟아졌다. 해주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밀려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 영혼, 겨우 설득해서 보내긴했는데 아무 말도 안 해주더라. 너한테 빙의된 상태여서 함부로 없앨 수도 없었어.”
하리가 해주를 부축해 폐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한낮에도 빛이 들지 않는 정원은 풀냄새가 가득했다. 해주의 몸이 자꾸 늘어졌기에 두 사람은 서둘러 산에서 내려왔다. 겨우겨우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의자에 앉았을 때는 둘 다 땀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