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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아 Oct 25. 2024

귀신이 고칼로리 06

상아 경장편 소설

영혼의 한이 강할수록 하리는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야 했다. 보통 체격이었던 하리가 자꾸 살이 빠지자 영문을 알 수 없어 온갖 병원을 전전하던 부모님은 우연히 만난 무당의 말에 하리의 능력을 받아들였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던 무당은 하리를 보자마자 손을 잡고 눈물을 쏟았다. 


많이 아프고 많이 나누어야 살 운명이야. 무조건 잘 먹여. 귀한 딸 헛되이 보내기 싫으면. 




“미주라는 분의 집안이 그런 위험한 짓을 한다는 건 외부에서는 몰랐나 봐.”


주말이 지나고 학교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점심시간이 되자 급식을 먹고 자연스럽게 운동장으로 향했다. 하리가 아이스크림을 두 개째 해치우며 말을 꺼냈다. 남은 주말 동안 각자 체력을 회복하면서 이것저것 알아본 것이다. 해주는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했다. 집중한 하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떻게 한을 풀어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되돌려 놓으라고 했지. 일단 그 집에 다시 가서 너랑 연결된 걸 끊어야겠어. 기억을 되찾았으니까 내 힘이면 떨어질 수 있을 거야.”


“성불, 같은 거 할 수 있을까?”


해주가 조심스럽게 묻자 하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워낙 긴 시간 동안 해주의 몸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장담은 할 수 없었지만 미주의 의지가 강하다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었다.


“이래 봬도 실패한 적은 거의 없었단 말씀.”


장난스럽게 웃는 하리 덕분에 해주도 긴장을 풀었다. 하리가 옆에 있어서인지 다른 귀신들의 손길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허무하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다 덮을 수 있을 만큼 해주는 지쳐있었다. 

느리게 지나가는 한 주를 무사히 보내고 하리가 다시 찾은 폐가의 뒤쪽으로 향하자 건물 기둥이 무너진 흔적이 보였다. 깨진 유리 장식도 발견했다. 미주처럼 저택 역시 오랫동안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집 안으로 들어와 희미한 햇살이 들어오는 복도에 서서 거울을 바라봤다. 몇 분 뒤 해주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와 함께 더욱 흐릿해진 미주의 모습이 비쳤다.


“늦어서 미안.”


해주가 숨을 몰아쉬어 뽀얀 먼지들이 날아올랐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흘러내렸다. 콜록거리며 부채질을 하는 손에 작은 수첩이 들려있었다.


“운 좋게 여기서 살다가 이사 간 분들이랑 연락이 닿게 됐는데 집 안에서 이걸 주운 분이 계시더라. 버리기에는 찜찜해서 그냥 가지고 있었대.”


심하게 변색된 수첩은 표지도 검게 그을려 있었고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펼쳐보니 글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서툴게 쓴 듯한 글씨가 보였다. 번지고 지워져 있었지만 둘의 눈에 콕 박히는 단어가 있었다.


“성미주에게.”


“해이라는 분이 쓴 건가 봐.”


툭, 거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살짝 웃는 미주와 눈을 맞추며 해주는 마저 수첩에 적힌 글을 읽어나갔다. 


“미주야. 나는 항상 너를 처음 봤을 때를 생각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를 맞고 배고픈 채 잠에 드는 날이 지겨워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던 날이었어.”




사람이 누구나 평등하다고? 교회에서 나누어준 딱딱한 빵을 조금씩 녹여 먹으면서 해이는 코웃음을 쳤다. 깨끗한 옷을 입고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매 끼니를 때우며 불우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음식까지 가진 저들과 자신은 결코 같지 않았다. 정말로 모두가 평등하다면 왜 자신은 이 낡은 옷을 고쳐가면서 입어야 하고 남들의 선의에 기대해야 하며, 부모님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인 채 살아야 하는가. 배가 고프다고 보채는 동생에게 남은 빵을 모두 준 뒤 마른침을 삼키는 해이에게 잘 차려입은 어른 서너 명이 다가왔다.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양껏 먹을 수 있다는 말에 해이는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집에도 돈을 보내준다고 하니 적어도 동생은 맞지 않고 자랄 것이다. 머릿속 저울을 금방 치운 해이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서양식 저택이었다. 보기에도 무거운 문이 열리자 단정하게 머리를 땋은 해이 또래의 소녀가 보였다. 해이는 잔잔히 가라앉은 눈과 마주친 순간 자신은 절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기꺼운 감금이었다. 


“친한 척하지 마.”


명확하게 선을 긋는 까칠한 말투가


“이거 먹어볼래?”


멋쩍게 웃는 눈빛과 함께 부드러워지고


“해이야.”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준 순간까지 해이는 미주에게 스며들었다. 일거수일투족을 관리당하며 좋은 가문의 우아한 고명딸로 자라고 있던 미주는 자유분방한 해이의 성격을 부러워했다. 정반대의 삶을 살았지만 같은 고통을 공유한 두 사람이 쌍둥이처럼 가까워진 것은 운명과도 같았다. 그래서 미주는 본인이 저주로 죽더라도 해이를 살리고 싶었다. 자신이 이 집에 오게 된 이유를 알게 된 해이는 미주를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괜찮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해이에게는 조금 큰 미주의 옷을 입자 익숙한 향기가 났다. 감정의 변화가 크지 않은 미주와 잘 어울리는 잔잔한 풀 향이었다. 해이는 미주가 선물한 수첩에 마지막 일기를 쓰며 기도했다.

부디 내 죽음에 너무 슬퍼하지 않기를. 나는 비참하게 죽는 게 아니라 너에게 삶을 선물하는 것이라고.




“나는 너를 위해 살 수 있었기에 행복해. 우리 다시 못 본 다고 생각하지 말자. 나는 너와 함께 남은 생을 살아갈 거야.”


담백하고 따뜻한 마음이었다. 수첩을 덮은 하리가 거울에 오른손을 가져다 댔다.


“해이라는 분은 마지막까지 당신을 위했던 거예요. 이제 다 내려놓고 가도 돼요.”


빛과 함께 거울 속 미주가 잘게 부서졌다. 오랜 기다림이 마침내 끝이 났다.

집에 돌아와 진이 빠져 침대에 쓰러진 해주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하나 둘셋넷, 4년. 괴롭고 외로운 시간이었다. 미주는 자신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세월을 견뎠을 것이었다. 소중한 사람이 희생되고 결국 덧없는 결말을 맞았으니 미련이 남을 수밖에. 미주가 사라지고 남은 머리끈과 수첩을 쳐다보다 고개를 들어 하리의 표정을 살폈을 때 하리는 슬픈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담담해 보이기도 했다. 너무 빤히 쳐다봤는지 하리가 고개를 들자 해주는 깜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거기서 왜 부끄러워하냐고…. 나쁜 짓 한 것도 아닌데.”


다시 생각해도 화끈거리는 뺨을 세게 문질렀다. 그래도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학교에서 보자는 인사말이 계속 귓가에서 맴도는 느낌에 괜히 발을 세게 굴렀다. 

아주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미주가 잘 떠났는지 궁금했다. 하리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오래 엮여서 좋을 게 없다고 했지만 과거를 알고 난 뒤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해주는 오늘까지만 둘의 행복을 빌기로 했다. 그리고 조금 욕심을 내서 자신의 행복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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