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 경장편 소설
해주에게도 소문을 듣고 먼저 다가오는 친구들이 있었다. 정작 본인의 어깨나 팔다리에 붙어 있는 존재에 대해 듣고 나면 질색하고 떠나곤 했다. 하리 역시 항상 마주하는 현실인 것들을 단순히 흥밋거리로 취급하는 아이들을 썩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희를 향한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니,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도희는 자신의 발언에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빠르게 인정했다. 일단 다음 수업 준비를 위해 이동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세 사람은 바쁘게 발을 옮겼다. 도희가 하리보다 걸음이 더 빨랐기에 해주는 속도를 맞추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하리의 말끔한 요약이 이어졌다.
“뭔가를 느끼기는 하는데 보이거나 들리는 건 아니라서 답답하다?”
“응. 저 화장실 같은 데 가면 온몸이 찌릿찌릿하거든? 근데 뭐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으니까.”
해주가 등교한 첫날에도 도희는 옆자리를 지나가는 해주에게서 특이한 기운을 느꼈지만 그뿐이었고 소문이 무성한 하리와 해주가 친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겠다고 짐작하기만 했다. 다가갈 기회를 엿보다 마침 음악 시간에 한 조가 된 것이었다.
“근데 꼭 자세히 알 필요가 있어?”
하리는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해주 역시 굳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거나 들리는 것은 괴롭기만 하다.
“너희도 둘보다는 셋이 낫지 않아?”
“우리가 왜?”
“한 명이라도 손이 보태지면 수월하잖아.”
“… 우리가 뭘 하는데?”
“… 너희 퇴마 같은 거 하고 다니는 거 아니야?”
“우리가?”
겉돌던 대화 끝에 침묵이 찾아왔다. 할 말을 잃은 도희가 상황을 이해하고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난 또. 너희가 배트맨처럼 몰래 미스테리한 사건들 해결하고 다니는 줄 알았네.”
“그런 거 아냐.”
“오해해서 미안해. 그래도 너네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친구는 괜찮지? 나 친구들이랑 싸워서 지금 같이 다닐 사람도 없거든.”
하리의 끄덕임에 도희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같이 밥 먹어도 돼?”
“나 준비물 살 거 있는데 같이 갈래?”
“너희 주말에는 뭐 하고 놀아? 같이 시내 가자.”
도희는 생각보다 말이 많은 편이었다. 매일매일 두 사람의 일상에 조금씩 끼어들었고 처음에는 부담스러워하던 해주도 도희의 웃음소리에 금방 적응했다.
4교시 음악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반에서 마지막으로 중간 점검을 받은 셋은 가장 늦게 음악실을 빠져나왔다. 수행평가 이야기를 나누며 2층을 지나가다 들린 울음소리에 해주의 걸음이 느려졌다. 화장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다시 무엇에 홀린 듯 화장실 앞으로 간 해주는 하리가 말릴 새도 없이 문을 열었다.
낮인데도 화장실 안은 어두웠다. 싸늘한 공기가 느껴지지 않는지 해주는 유일하게 꽉 닫혀 있는 세 번째 칸으로 성큼성큼 향했다. 3학년 수가 적어 사용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텐데 화장실 칸 아래에 흥건하게 물이 고여 있었다. 찰박. 실내화가 물웅덩이를 밟자 울음소리가 그쳤고 하리는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리를 쳐다보는 해주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이래서 조심하라고 한 건데.”
해주는 보는 사람이 더 서러울 만큼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리를 지나 가까이 간 도희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팔을 잡자 해주가 화들짝 놀라며 주저앉았다. 작은 목소리가 주문처럼 흘러나왔다.
“미안해.잘못했어.때리지마,시키는대로할게.살려줘.미안해.정말이야.살려줘.”
도희 역시 등줄기를 연거푸 쓸어내리는 한기와 오소소 돋은 소름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주변을 살펴보니 하리의 시선은 해주를 살짝 빗겨나 있었다. 도희와 눈이 마주친 하리가 짧게 한숨을 쉬고 해주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해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동자가 약간 진해진 것 같았다.
“내가 뭘 하면 돼?”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아, 안 때려?”
“어. 안 때려. 친구잖아.”
“친구….”
하리가 계속해서 머리를 쓰다듬었고 해주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하리를 따라 심호흡하며 눈물을 그친 해주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 나한테 화 안, 안 났어?”
“응. 괜찮아. 화 안 났어.”
안타까움을 넘어 답답할 정도의 질문에도 하리는 정성껏 대답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도희가 해주를 살짝 껴안고 토닥였다. 경직된 어깨가 서서히 내려갔다. 아주 천천히.
“무서워하지 마. 괴롭히려는 거 아냐…. 근데 너 우리 학교 학생이야?”
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름이 뭔지 말해줄 수 있어?”
“……. 박주경.”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부드러운 모습의 도희가 의외였는지 하리가 반걸음 물러나 두 사람을 쳐다보다 물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 몰라.”
“그럼 기억나는 게 있으면 하나씩 얘기해 볼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점심부터 먹이고 이야기를 더 들어보려고 했지만 해주가 화장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박령. 하리가 낮게 내뱉는 말을 들은 도희가 하리의 어깨를 툭 쳤다.
“밥 먹고 와. 내가 해주랑 같이 있을게.”
주머니에 들어있는 초코바 개수를 떠올리던 하리가 고개를 저었다. 배가 고프긴 해도 눈앞에 더 큰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하리는 초코바 두 개를 한입에 넣고 씹었다. 달고 고소한 맛이 입 안에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텁텁함을 남기고 녹은 초콜릿 대신 남은 아몬드를 힘차게 부순 뒤 기운을 냈다.
“몇 학년 몇 반이었어?”
멍한 눈빛은 확실히 해주의 것이 아니었다. 목소리도 너무 작아서 집중해야 했다. 점심시간을 맞아 복도를 돌아다니는 소음이 들릴 법도 한데 화장실 안에는 해주의 말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셋만 다른 공간 속에 있는 것 같았다.
“2학년… 기억 안나.”
“좋아. 주경이라고 했지. 또 기억나는 게 있을까? 떠오르는 건 다 얘기해줘. 그래야 널 도울 수 있어.”
하리의 뜻이 전해졌는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 해주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고도의 참을성을 요구하는 시간이었지만 둘은 몇 가지 정보를 얻어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2학년. 몇 반인지는 모르지만 반장이었다. 근데 반장이 된 것도 1학년 때부터 괴롭히던 애들이 시킨 거고.”
더듬더듬 기억을 토해낸 주경이 기침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해주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 혹시….”
“빙의됐었어. 아마 오랫동안 귀신이 붙어 있었으니까 빙의되기 쉬운 체질이 된 걸지도 몰라. 내가 무작정 손을 대기도 어려운데….”
도희의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모른척하며 하리는 해주의 등을 쓸어내렸다. 잔기운이 빠지자 더부룩한 속이 진정되며 편안해졌다.
잔뜩 지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할 상태였기에 먼저 교실로 돌아온 해주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몇 분 걸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빙의가 된 시간 동안 해주는 지독한 고통 속에 갇혀 있었고 손의 떨림이 아직까지 멈추지 않고 있었다. 말 그대로 맨발로 얼음을 밟고 서 있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