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는 과학, 관상은 인생
저는 드라마를 즐겨봅니다.
원픽은 ‘로코’지만, 재벌이 등장하는 시리즈도 은근히 좋아합니다.
그런 드라마를 볼 때면 가끔 재벌가 막내사위가 된 제 모습을 상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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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장인어른)에겐 네 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3남 1녀.
세 아들은 후계 구도와 계열사 경영을 두고 늘 타이트한 삶을 살아갑니다.
반면, 막내딸과 사위인 저는 재산이나 그룹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회장님과 형님들이 경계 없이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지난 주말, 회장님은 오셔서
사업보다 더 어려운 골프 이야기를 안주 삼아 삼겹살에 소주 한 잔 기울이고 가셨습니다.
어제는 큰 형님이 오셔서
‘나는 솔로’ 옥순의 싸가지를 안주 삼아 김치전에 막걸리 한 잔 걸치고 가셨습니다.
오늘 저녁엔 둘째 형님이 오셔서
손흥민의 미국리그 활약상을 안주 삼아 빈대떡에 경주법주 한 잔 털고 가셨습니다.
내일은 막내 형님 차례입니다.
롯데자이언츠의 충격적인 가을야구 탈락을 안주 삼아 오뎅탕에 저렴한 사케, ‘오또상’을 함께할 예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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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입니다.
회장님이 다녀가신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형님들에게 연락이 옵니다.
“혹시 회장님이 그룹 얘기 안 하셨어?”
형님들이 다녀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부인 척하며, 다른 형님들이 무슨 얘길 했는지 서로 염탐하는 것이죠.
심지어 자기들끼리 만남에서 나온 이야기를 추측하고, 경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일상적인 대화와 소소한 안주를 나눴을 뿐인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뭔가 더 숨은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라는 불안에 스스로를 괴롭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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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습을 보니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 일화가 떠올랐습니다.(썰을 각색해 봤어요. 사실 확인 불가)
당시 일본의 단독 개최가 유력했지만, 우리는 공동개최만 되어도 큰 성과였죠.
우리 축구협회장은 일본의 가장 확실한 지원국(A국) 회장과의 저녁 자리를 어렵게 마련했습니다.
그날 저녁, 지지를 호소할 거라 생각했지만 정말 식사만 하고 끝났답니다.
대화가 궁금했던 일본은 즉시 A국 회장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무슨 얘기했습니까?”
“특별한 얘긴 없었어. 그냥 식사만 했어.”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라니까, 정말 식사만 했다고.”
순간, 일본은 직감했습니다.
“아, 이거 넘어갔구나.”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공동개최에 동의했고, 역사적인 결과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팩트인지는 몰라요)
형님들의 술자리 불안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정작 아무 얘기도 없었는데, 스스로 의심하고 긴장하면서 마음을 더 옥죄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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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게 없어 보여도, 끝없는 경계심 속에 사는 삶은 결코 부자가 아닙니다.
루이 화장실 청소 담당인 저와 다를 게 없지요.
아니, 어쩌면 더 힘들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돈으로 세는 부자가 아니라, 마음으로 세는 부자가 진짜 부자다.
선하게 살아온 세월이 얼굴에 편안한 인상으로 새겨지고,
마음의 곡간이 가득 차는 삶.
적당한 건강, 친구, 시간, 여유, 돈... 등이 없이 편안한 인상은 없을 테니까요.
저는 그런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