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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 봉 Sep 24. 2024

와인은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좌우됩니다.

상봉 조감도 : 2024년 4월

아래 내용은 '상봉 조감도' 뉴스레터의 2024년 4월 호입니다. 뉴스레터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다면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


평소에 조금 더 유심히 관찰하고 생각해 보면, 술은 종교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고, 믿음을 가진 자들이 모여 숭배합니다. 때로는 그것으로 인해 머리가 깨지는 듯한 고통이 찾아오기도 하며, 때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안겨주거나 삶의 통찰 내지는 깨달음을 얻게 해줍니다.


인류 문명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까지 기어코 올라가야 그 역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로소 주(酒)님의 탄생 시기를 알아낸 것이죠. 


수천 년 전부터 빚어낸 술은 현대에 이르러 취향을 나타내는 하나의 소비재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톡 쏘는 탄산으로 청량함을 뽐내는 맥주를 좋아하는 청년이 있는가 하면, 굳이 비 오는 날이 아니어도 녹진한 막걸리와 기름진 안주를 곁들이는 분이 있을 수 있죠. 아니면 저처럼 술에 얽힌 이야기나 맛과 향, 주변 요소들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와인이라는 술은 제게 안성맞춤입니다. 예컨대 가볍게 마시기 좋은 스파클링 와인부터 복합적인 풍미와 진한 향을 자랑하는 레드 와인까지. 평생에 걸쳐 알아가도 부족할 와인의 세계는 어쩌면 학문의 영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끝없는 배움의 길을 맞닥뜨린 이 순간, 제가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행동은 역시 기록입니다. 이 기나긴 여정에 나침반이 되어주기도, 말동무가 되기도 할 테니까요. 그 기록의 시작을 여러분들과 나누기 전에, 먼저 알릴 내용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천천히 음미하실 아래의 글은 제 생각으로만 온전히 담긴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포도 품종으로만 만든 내추럴 와인처럼 그 향과 색이 뚜렷한 편이죠. 그렇기에 이번 호 역시 몇몇 분들의 취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사전에 말씀드립니다.


또한, 아래 내용은 와인 신생아, 와인 단세포생물, 와인 호모 사피엔스가 남겨 놓은 첫걸음마이자 첫 세포분열이며, 첫 동굴의 벽화인 셈이기 때문에 박물관에서 보듯 미소를 머금고 가벼운 마음으로 바라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나친 음주는 뇌졸중, 기억력 손상이나 치매를 유발합니다.

임신 중 음주는 기형아 출생 위험을 높입니다.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


성인이 되어 처음 경험한 와인은 아마도 편의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G7이나 Yellow Tail 제품이었을 겁니다. 가장 저렴하다는 이유로 선택된 와인들과의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지나치게 떫은맛이거나, 시큼하거나 해서 이럴 거라면 빠르게 털어놓을 수 있는 소주와 맥주를 마실 걸이라는 후회를 가득 품었죠(실제로도 그랬습니다만).


한동안 와인을 즐길 기회가 없었다가, 올해 생일 기념으로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레드 와인과 포트 와인 등 다양한 종류를 마셔보다 꽤 괜찮은 화이트 와인을 발견했습니다. 쨍한 산도와 청사과 향, 풀 향이 좋았던 와인이라 가볍게 즐기기 좋았거든요. 단숨에 라벨을 찾아보니 뉴질랜드 말보로 지역의 소비뇽 블랑이라는 포도 품종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마셔봤던 화이트 와인이 떠오르더군요.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 스톤베이 입니다


다니던 회사의 행사를 통해서 경험해 본 와인들은 상당한 가격과 복합적인 맛을 자랑했습니다. 앞으로도 만나보기 어려울 것이란 직감이 그 순간 들기도 했고요. 그럼에도 인상 깊었던 건, 꽤 기름지고 풍성한 풍미를 가지고 있던(지금으로서 가장 가까운 표현은 크리미함) 화이트 와인이었습니다. 정확한 포도 품종과 이름을 알지는 못하지만 적지 않은 충격으로 깊은 잔상을 남겼습니다.


혀의 미뢰들이 춤추며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갔던 이 경험은 상당한 흥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앞으로 찾아볼 것들이 무궁무진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죠. 와인 자체의 다양성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음식과 궁합이 좋은지 고민하고 이를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 모두 즐거움이자 기쁨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 [와인의 몹시 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님의 문장을 빌려봅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일종의 돌발 사고다.” 이제부터 와인을 좋아하겠다는 마음가짐을 정월 초하루부터 지켜온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 나 이런 게 좋아하네’와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막간을 이용한 와인 기초 지식
(포도 품종에 관하여)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그리고 스파클링 와인 혹은 로제 등 와인의 종류는 기본적으로 여러분 모두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자리에서 다양한 포도 품종을 언급하면, '이 녀석, 좀 치네?' 라며 주도권을 가져올 확률이 높아집니다. "나는 말벡보다는 메를로가 좀 더 맞더라." 내지는 "그래도 소비뇽 블랑이 근본이지!" 라며 본인의 취향을 살포시 대화에 얹을 수 있습니다.


레드 와인

카베르네 소비뇽 Carbernet Sauvignon

피노 누아 Pinot Noir

말벡 Malbec

메를로 Merlot

시라(쉬라즈) Syrah/Shiraz

진판델 Zinfandel


화이트 와인

소비뇽 블랑 Sauvignon Blanc

샤르도네(샤도네이) Chardonnay

리슬링 Riesling

그뤼너 벨트리너 Grüner Veltliner

슈냉 블랑 Chenin Blanc


그리고 스파클링 와인과 로제 와인


위의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에 탄산을 주입한 것이 스파클링 와인입니다. 그중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만드는 최고급 스파클링 와인을 샴페인(Champagne)이라 칭하죠.


로제 와인은 쉽게 말하면 레드+화이트가 아닌, '되다 만 와인'입니다. 포도 껍질에 접촉하는 시간을 짧게 가져가면서 색을 옅게 만드는 와인이며, 화이트 와인처럼 가볍게 마실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화이트 와인의 가벼움


역시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 더 패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와인은 소비뇽 블랑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가벼운 질감과 충분한 산도, 그리고 산뜻한 향이 어우러져 날씨 좋을 때 다양한 음식과 곁들일 수 있기 때문이죠.


특히, 뉴질랜드의 소비뇽 블랑은 지금껏 꾸준한 관심을 주고 있는데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호불호 없이 모두가 만족할 만한 와인이라 데일리로 즐기길 추천해 드립니다.


편의점에서 구매한 '음'이라는 리슬링 입니다


최근에는 리슬링 품종도 경험했습니다. 소비뇽 블랑과 비슷하면서도 더 상큼한 레몬 향이 독특했고, 끝에는 살짝 씁쓸한 맛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편의점에서 구할 수 있는 가성비 화이트 와인임을 감안하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겠네요!


화이트 와인도 소비뇽 블랑뿐만 아니라 샤르도네, 슈냉 블랑 등 다양한 품종이 있어서 천천히 시간을 두고 즐길 예정입니다. 주머니 속사정 이슈로 저 머나먼 유럽까지는 도달하지 못할지언정..


그런데도 와인에 대한 첫 취향이 화이트 와인으로 굳어진 것은 참으로 다행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 한해서는 그저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마리아주 : 기억 조작의 순간


와인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음식과의 조화, 마리아쥬(Mariage)입니다. 프랑스어로 '결혼', '혼인'의 뜻을 가지기도 한 단어인 만큼, 술과 안주의 궁합을 적확하게 의미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번 호에서는 좀 더 범위를 넓혀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뿐만 아니라 날씨, 음악까지 선보일까 합니다. 이 세계에서는 일부다처제, 다부일처제를 응원하는 것이려나요.


1. Dashwood Sauvignon Blanc 2022


5월의 어느 날. 어제는 비가 한껏 내렸는데,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쾌청한 하늘과 내리쬐는 햇빛이 그저 싱그럽네요. 벚꽃과 개나리, 철쭉이 모두 급하게 인사하고 떠난 뒤 남은 건 초록색뿐입니다. 풀 냄새 가득하더군요. 늦지 않게 친구를 만나 가볍게 낮술(!)을 하기로 결정하고, 근처 와인바에 도착했습니다. 특이하게도 와인과 아이스크림의 조화라니요. 걸으면 더워지는 이 날씨에 제격이라, 다른 메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시원한 와인에서는 청사과향이 두드러지고, 날씨 때문인지 풀 향도 짙은 것 같습니다. 한 모금 마시며 혀를 깨우는 산미와 청량함이 느껴질 때쯤, 달콤하고 쫀득한 아이스크림이 부드럽게 감싸줍니다.


정신없이 대화하다 보니, 매장에서는 지금과 찰떡인 노래가 흘러나오네요.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해두고 싶어서 사장님께 조심스레 여쭤봅니다. [Is It You - Lee Ritenour] 라고 하네요.


https://youtu.be/mTYMDucyeSM?feature=shared




2. KOPKE Fine Tawny


우연히 당첨된 페스티벌 티켓이 생겼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공연은 처음이라 긴장 반 설렘 반이었죠. 현장에 가보니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예상보다 사람이 훨씬 많았거든요. 가까스로 티켓을 팔찌로 교환한 뒤에 입장하는데, 때마침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진부한 표현을 다시 꺼냅니다. 페스티벌에 마침 와인을 판매하네요. 쨍한 날씨 때문에 화이트 와인을 고를까 하다가, 포트 와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알코올 향이 강하면서 단맛이 출중한 녀석이었죠.


해가 저물면서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하늘은 와인색을 닮아갑니다. 노래를 듣고 보니 [Heartbreak Anniversary - Giveon] 이었습니다. '기브온.' 그도 역시 와인 한 잔을 들고 있더군요. 선선한 날씨,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노래, 그리고 진득하게 담긴 포트 와인 한 잔까지. 어둑한 저녁이 다가오며 마지막 한 모금을 털어놓고 우연이 선물한 희열을 만끽합니다.


https://youtu.be/lL8nLq8XE2M?feature=shared




취향을 공유할 수 있다면


어떠셨나요? 여전히 이 글을 이곳까지 내리셨다면 꽤 끈질긴 근성과 참을성의 소유자이심은 분명합니다. 머릿속 정보와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장들이 부디 여러분의 지적 유희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쯤에서, 여러분께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와인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 주세요! 혹은 앞으로 나누고 싶은 와인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면 직접 경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와인은 그 자체를 즐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어떤 음식과 페어링하고 어느 시간과 날씨에 누구랑 함께하는지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요. 와인을 결정짓는 3요소랄까요.


돌발 사고와 같았던 와인과의 첫 만남과는 다르게 앞으로 지속적인 후유증이 남을 것 같습니다. 누구(헤밍웨이)는 와인을 너무 좋아해서 심지어 손녀 이름을 마고라고 지었는걸요. (마고는 보르도 지역의 유명한 와인 생산지이자 샤토 마고라는 와인 명칭입니다.)


어쩌면 좋아하는 와인을 나누고 싶었던 것은, 취향을 지속해서 공유함으로써 그 자체로 행복감을 느끼기 위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총 5번의 행복감을 맛보았고요. 어김없이 한 달이 지나 또 다른 주제로 찾아뵙게 될 텐데요. 그 사이 여러분들에게도 갑작스러운 취향과의 만남이 성사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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