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아무것도 쓰지 않는 그 공간에서 남겨진 흔적들을 꺼내본다.
이제는 잘 쓰지 않는, 오래전에 만든 블로그가 하나 있다. 인터넷 상에서 어떤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 나란 존재를 드러내는 것. 그것이 인간의 복잡다단한 욕망 중 하나라는 것, 그리고 그 욕망을 거스르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했던 2005년의 어느 날부터. 나는 무엇인가를 쓰고 올리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블로그라는 공간을 자신의 방처럼 여겼던 때였다. 화려하게 치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배경음악을 구입해 거는 사람도 있었다. 내 블로그에도 다양한 사람이 다녀갔다. 어떤 사람들은 꾸준히 내 블로그를 찾아와 댓글을 달고, '이웃 추가'를 하고,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그들이 어떤 경로로 내 블로그를 발견했는지는 모르지만 각자의 이유가 어찌 되었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상대가 궁금해지면 그 사람의 블로그에 가보면 될 일이었다. 어쩌다 코드가 맞는 사람을 발견하면 기쁜 일이었고, '이웃'을 맺고 서로의 블로그를 자주 오가는 사이가 되면 그 자체로 어딘가가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알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잠깐의(가상의) 인연으로 머물다 사라졌다. 하지만 끝내 친구가 되어버린 사람도 있다. 디지털상의 존재를 '진짜'로 만들기 위해 두려움과 갭(gap)을 극복해 낸 사람들. 이제는 나의 '진짜'가 되어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친구가 된, 한때는 가상이었던 사람들. 결혼을 했는지, 아이는 잘 크는지, 석사나 박사를 졸업했는지, 가게는 잘 되고 있는지 물어보게 된 사람들.
그때를 추억하며 이제는 어떤 것도 올리지 않는, 그러나 폐쇄하진 않은 그 공간을 가끔 들어가 본다. 후미진 골목의 모퉁이 가게처럼 하루에 한 명 찾아올까 말까 한 그 공간에서, 가끔은 누군가의 발자취를 발견하기도 한다. 오래전에 본 듯한 기억이 날듯 말듯한 닉네임. 혹시나 해서 방명록을 뒤져보면 서로 왕래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구인지는 기억해내지 못한다.
기억나지 않는 사람을 유추해보려 애를 쓴다. 방명록에 남긴 글이 제법 되는데도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 '군대 간다'는 글인데, 거기에 나의 댓글은 달려 있지 않다. 그가 남긴 다른 글에는 나의 댓글이 모두 달려 있었던 것으로 보아 꽤 친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여전히 그가 누구인지는 기억해 내지 못한다.
- 아마 군대 가기 전 마지막 인사였을텐데. 댓글도 달지 않았다니.
야박했던 나를 타박해보기도 한다. 여러모로 나는 좀, 이상한 사람이었다.
4년 전만 해도 그 블로그에 일상 같은 것을 포스팅하긴 했었다. 블로그를 다른 주소로 옮기기도 하고 한동안 그곳에 열심히 글을 썼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다시 예전 블로그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의 난 5년 넘게 사귀었던 사람과의 이별 후유증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한 배출구로 블로그에 글을 쓰곤 했는데, 대부분 일기 같은 것이었다. 회사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몹시도 휘청이던 때였는데, 그즈음에 공교롭게도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블로그에서 일어났다.
고등학생 때 첫사랑이 다녀간 발자취를 발견한다거나, 대학 때(아마도 10년 전쯤) 사귀다 헤어진 사람이 방명록에 안부를 묻는다거나, 내가 평소 꿈꾸었던 이상형이라며 자기 연락처를 비밀 댓글로 남긴다거나 하는 일이었다. 어째서 그런 일이 그 시기에, 그것도 집중적으로 일어났는지는 의문이었지만 대강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나의 일상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을 것이고, 그것을 발견한 누군가는 본능적으로 그 자리를 파고들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즈음 나는 블로깅을 멈추었다. 나의 위태로움을 어떤 '기회'로 여겼을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게 사실이든 망상에 불과하든, 어느 순간 블로그는 순수한 자기 위안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버린 듯했다. 무엇이든 써내도 괜찮을 것 같았던 그 공간에서 뭔가에 취해 비틀거리는 내 모습이 보였고, 과거의 나를 알고 있는 이에게 더는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후 몇 년이 흘렀다. 이제는 아무것도 쓰지 않는 그 공간에 남겨진 흔적들을 꺼내본다. 지난했던 나의 이십 대를 기억하는 사람들, 내 어리석고 부끄러운 독백을 읽은 사람들의 댓글과 방명록의 글들. 또, 내가 그들에게 남긴 댓글들과 방명록들.
-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글을 남겼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나의 글을 본다. 낯설다. 지금의 나라면 쓰지 않을 것 같은 글과 이모티콘들. 어쩌면 사랑받고 싶어서 내뱉었을 말들. 하지만 그것들을 통해 연약한 코스모스 같았던, 그래서 더욱 흔들렸던 나를 기억해낸다. 꽤 긴 시간 동안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니다, 오히려 반대일지도 몰라, 하고 의심해보기도 한다.
오래 비워둔 그 공간을 누군가 계속 찾아올지 모르겠다. 무의식에 새겨져 있던 뭔가가 의식으로 떠올라 내 블로그로, 내 글로 흘러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사람이 '미래의 나'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래서 폐쇄하지 않은 채 계속 두기로 했다.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과 기억나지 않는 소통, 기억나지 않는 나의 단편에서 어떤 '단서'를 찾을지도 모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