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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다인 Dec 17. 2021

따뜻한 사람과 쿨한 사람.

뭔가를 잘 모으는 사람과 잘 버리는 사람.

뭔가를 잘 모으는 사람과 잘 버리는 사람. 종종 이 두 가지 유형에서 다른 온도감을 느낀다. 대개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종종 어떤 사람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을 온도로 구분하곤 한다. 따뜻함과 쿨함. 내 입장에선 둘 다 좋은 것이라  좋고 싫음의 기준이 되진 않는다. 따뜻한 사람은 따뜻해서 좋고, 쿨한 사람은 쿨해서 좋다.


내 기준에서 우리 외할머니는 '쿨'한 쪽이다. 어딘가 과감한 구석이 있는 외할머니는 뭔가를 잘 버리는 사람이다. '잘 버려야 잘 산다' 주의자. 다시 사게 되더라도 '버리자'는 생각이 들면 고민 없이 휴지통으로 슉, 골인.

그런 할머니를 엄마로 둔 우리 엄마는 '따뜻함'쪽이다. 미련도, 추억도, 절약 정신도 많아 잘 못 버리는 사람. 엄마는 잘 모으는 사람이다. 엄마는 나와 남동생이 유치원 때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나 그때 그린 그림 같은 것을 아직도 가지고 계신다. 열심히 버리고 버렸지만 사랑스러워서 끝내 못버린 그 물건들 때문에 우리는 종종 깔깔대며 웃는다. 그런 엄마가 뭔가를 버릴 때는 마음에서 어떤 결단을 했을 때다. 물건을 버린다기보단 근심이나 기억을 버리는 쪽에 가깝다.


엄마랑 비슷한 온도가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중3 때부터 친구인 유리. 실제로 그녀가 뭘 가지고 있고 가지고 있지 않은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종종 내가 기억도 못하는 물건을 보여주거나 내 것이라며 돌려준다. 내 기준에서 그런 그녀는 '따뜻함'의 범주에 있다. 어떤 사물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뭐랄까, 그 안에 깃든 어떤 기억이나 의미를 간직하는 느낌이랄까. 이런 사람들은 물건에 감정을 이입을 하거나 의미를 부여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처음 준거라서, 십 년째 간직하던 거라서,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서, 이상하게 못 버리겠어서. 간직한다.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남동생, 물건 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남편, 시어머니는 쿨 쪽이다. 이 세 사람은 뭔가를 모으는데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인지 자주 뭔가를 나눠준다. 이유도 다양하다. 어디서 선물이 들어와서, 집에 너무 많아서, 잘 사용하지 않는 거라서, 정리하다 발견해서, 네 생각이 나서. 쿨하게 준다.


온도로 말하자면 사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느낌인데, 쿨한 쪽에 가깝다. 모으는 것과 버리는 것. 두 가지 중에  버리는 것을 좀 더 잘한다. 쓸모가 없어진 물건, 몇 년 동안 한 번도 안 입은 옷, 재미가 없었던 책, 오래된 전자제품 같은 것을 별 고민 없이 버린다. 마음이 쓰리거나 하는 경우도 별로 없다. 오히려 후련하다.


'수집'이라는 단어에 '힘 력(力)'자가 더해진 '수집력'이라는 능력을 내게 적용한다면 꽤나 보잘것없는 수치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수집은 시간이 필요한 일인데, 나는 시간을 들여 뭔가를 모으는 행위를 잘 하지 못한다. 누구나 한 번쯤 모아본 기억이 있는 우표나 동전 같은 것도 단순히 '수집'의 목적으로 모아본 기억이 없다. 언젠가 다 쓴 A6사이즈의 몰스킨 노트를 버리지 않고 10권 정도 모아둔 적 있었는데, 자취방을 이사하면서 몽땅 버렸다. 이사를 도와주던 친구가 괜히 아깝다고 했지만(그 친구도 '따뜻함' 쪽.) 달리 쓸모가 생각나질 않았다. 사유가 끊이질 않았던 나의 이십 대의 기록들은 그렇게 재활용 쓰레기 더미로 사라졌다. 생각해보니 별 고민 없이 버려진 것들이 꽤 많다. 수백장의 드로잉들, 제출하지 못한 논문과 자료들, 선물 받았지만 두통으로 인해 모셔두었다가 사용기한이 지나버린 향수들.


물건의 쓸모, 그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것들을 버릴 때의 과감함은 외할머니를 닮은 것도 같다. 하지만 어쩌다 의미를 부여해버리면 정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애착을 넘어서서 그 물건의 노예가 된달까. 몇 해 전 남편이 생일선물로 준 만년필을 학회에 갔다가 잃어버린 적 있었다. 그와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생일이 되었는데 같이 만년필 전문점에 가서  만년필을 고르고 서로 좋아하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뭘 잘 흘리고 다니는 편이었지만 몇 년간 잃어버리지 않고 잘 지니고 다녔는데 하필 멀디 먼 강원도에 두고 와 버렸다.


서울에 돌아와서야 그 사실을 알아챘는데 그 상실감에 눈물이 났다. 다시 강원도로 돌아가도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모르니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동료가 왜 그러냐고 물어 하소연을 늘어 놓다 문득 만년필을 잃어버리게 된 과정을 기억해냈다. 마침 다음날까지 학회에 남아 있는 후배가 있었고 그녀가 만년필이 들어있던 내 파우치를 찾아주었다.

"찾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소중한 물건인 것 같은데!"

나는 그녀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어쩌면 인생 통틀어 물건을 향한 내 마음이 가장 뜨거웠던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이후 그때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휴대폰이나 카드지갑 같은 것을 어딘가에 두고 오는 등 가슴을 쓸어내릴만한 사건이 종종 일어나긴 했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금방 찾았다. 물건을 못찾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마다 나는 "괜찮아요. 어차피 새로 사려고 했어요." 혹은 "몰라. 귀찮아."라며 스스로 물건을 버리는 쪽을 택했고, 그때마다 남편은 "그래. 정 못 찾으면 다른 거 사면되죠."라고 말하며 나를 다독이는 패턴이었다.

나도 남편도 '쿨함' 쪽이라 가능한 대화였다. 엄마가 봤으면 등짝 스매싱을 얻어 맞았을지도 모를 일인데 말이다.



+

“당신은 따뜻함, 쿨함 둘 다에요.”

“물건이 내는 온도에 따라 내가 따뜻해지냐 쿨해지냐가 정해지는 거 같애.”


문제의 라미 만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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