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아파트에 사는 나는 마치 절벽에 난 풀과 같다.
나는 아파트 20층에 살고 있다. 고층 빌딩에서 일해 본 경험은 많지만, 고층에 살아본 것은 처음이다. 어릴 때부터 줄곧 6층 이상 살아본 적이 없었고 고소공포증 때문이라도 고층은 별 인연이 없어 보였는데, 지난번 살던 빌라의 층간 소음이 심해 '탑층'을 알아보게 되었다.
이사 오기 전 부동산 공인중개사는 두 개의 매물을 보여주었다. 이 아파트의 꼭대기는 23층인데, 남서 방향의 23층과 남동 방향의 20층이었다. 20층은 탑층이 아니지만 주인이 설치한 에어컨을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23층은 탑층이긴 하나 집 관리가 잘 안되어 있다고 했다. 층간 소음이 나에겐 더 중요한 이슈였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 마음을 움직인 건 20층이었다. 코로나 때문인지 20층 주인은 '외부인'인 우리 부부에게 심한 경계심을 표했는데(신발을 벗자마자 손부터 씻어달라고 요구) 위층에는 노인 부부가 살고 있으며 살면서 층간 소음을 느껴본 적 없다는 말에 20층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선택이 옳았음을 느끼게 되었다.
물론 층간 소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 있었다. 아파트 단지 바깥의 도로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흥분한 운전자의 경적소리라던지, 이 집 저 집의 생활 소음과 음식 냄새를 견뎌야 하는 건 어느 아파트에서나 있음 직한 일일 테니까. 한동안은 견디기 힘들 만큼의 인테리어 공사 소음이 들리기도 했다. 다행히 공사 기간이라도 공사팀이 철수하는 저녁 시간에는 거의 적막이라고 할 만큼의 고요함을 안겨주었다.
이전 집에서는 소음에 신경이 쏠리는 것을 막아볼 요량으로 항상 음악을 틀어 두곤 했는데, 이 집에선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고층이라 파리, 모기 같은 해충에서도 자유로웠고, 옆집은 비어 있었기에 왠지 모를 안전감마저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집이 주는 적막과 고요를 즐기게 되었다. 주로 저녁 시간에 공부하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썼고 새벽까지 깨어 있는 날도 많았다. 깊은 밤 서재에 앉아 있으면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들이 가만히 말을 건다. 드문드문 느린 속도로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불빛과, 은은하게 나무들의 실루엣을 비추는 가로등, 505동의 아직 잠들지 않은 사람들의 불빛이.
나는 십 대 시절부터 밤을 사랑했던 '빼박' 새벽형 인간, 올빼미족이다. 하지만 아침의 상쾌한 공기와, 한낮의 활기도 사랑한다. 고층에 사니 베란다 창문을 통해 먼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는데, 시시각각 달라지는 하늘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재밌는 사실은 시간대별로 시선이 머무르는 곳이 달라진다는 거였다. 아침과 저녁에는 해가 뜨고 지는 먼 하늘을, 한낮과 오후에는 거리의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뭐든지 조금 느리게 보인다.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아이들과 함께 걷거나 산책을 하는 노인들은 그보다 더 느리게, 아주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밑에서는 크게 보이는 동작들이 위에서는 그저 꼬물꼬물 작은 움직임으로 보인다. 어떤 연령대이건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로 보인다.
어느덧 사람들의 느린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 소소한 재미가 되었다.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모습으로 움직인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멈추거나, 갑자기 손을 놓쳐버린 아이를 기다리려고 멈춘다. 갑자기 버스나 택시를 타기도 하고 꺾어진 길로, 공원으로, 아파트 단지로 느리게 사라진다.
오후가 되면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자연히 나의 시선은 숲을 향하게 된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푸르렀던 나무들이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더니, 화려함의 절정을 지나 잎을 마구 떨어뜨렸다. 오후 4시 반에서 5시 사이가 되면 말갛던 하늘이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다가 급작스레 어두워진다. 이제 시선은 까만 밤과 대비를 이루는 불빛들을 향한다. 아파트 한 칸 한 칸 켜진 네모난 불빛들을 보면 역시 이곳은 아파트 공화국이구나 싶다. 그리고 한 집, 한 집의 저녁이 보인다. 일과를 끝내고 돌아온 사람들의 저녁이다.
고층에 있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 관찰을 좋아하는 성향도 한몫하겠지만 그렇다고 매 순간 창밖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주 보게 된다. 문득 생각을 유영하고 싶을 때 시선이 머물기 쉬운 곳이 창밖이기 때문에, 드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는 곳이 창밖이기 때문에. 창밖의 풍경은 집순이를 밖으로 끌어내기에 충분한 동기를 주기도 한다. 조깅을 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뛰어 볼까', 숲으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면 '산책을 가볼까' 생각하게 되고, 바깥의 에너지에 이끌리듯 옷을 챙겨 있고 밖으로 나가게 된다.
한편, 고소공포증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고층에 살다 보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여전히 두렵다. 창문이나 유리로 바닥이 막힌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먹이 쑥 들어가는 난간에서는 곧바로 공포감이 밀려온다. 이건 산꼭대기나 백화점의 에스컬레이터, 특이한 건축물의 루프탑, 다리의 난간에서도 있는 일이다.
나는 이걸 '난간 공포'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투명하든 아니듯 우선 난간이 막혀 있는 형태여야 하고, 유리가 두터워 보이지 않으면 일단 두렵다. 그래서 남편이 집에 오는 모습을 보려고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 때면 종종 구토감이 밀려온다. 이 집에서 일 년 반 정도 살았음에도 몸은 20층의 높이가 주는 공포감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
또 이 집은 높은 만큼 춥기도 하다. 난방을 조금만 틀어도 훈훈했던 이전 집과는 달라서, 첫겨울 동안엔 난방비가 많이 들었다.(게다가 작년엔 눈이 참 많이 왔던 겨울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환기를 잘해야 창틀에 곰팡이가 생기지 않는다. 느낌상 저층보다 더 건조한 거 같기도 하다. 태풍 소리나 비행기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는 단점도 있다. 여기에 공포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걸 제외하고는 대체로 만족스럽다. 소음에 대한 다양한 기준이 생겼고, 초민감자인 내가 잘 견딜 수 있는 자극이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의 답을 얻어가는 중이다.
내년 여름이 되면 계약이 만료되는데 이 집을 떠나야 할지 고민이 된다. 금전적인 문제도 해결해야 하지만 남편이 자기 방에서 보는 노을을 너무나 사랑한다. 노을이 주는 낭만이 생각보다 크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고민이 되었다. 그와 앞으로 살고 싶은 주거 형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는 '집(거주형태)이 사람을 바꾸는 것 같다'고 했다. 집을 매개로 나라는 사람의 성질이 서서히 바뀌어가는 것 같다고.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이 집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을까. 고층살이를 하고 있는 나는 '절벽에 난 풀'같다고 느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서, 약간은 고독한 관찰자가 되어 은신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뷰 맛집이라는 장점이 많지만 뭐랄까, 조금 더 자주 지면을 밟으면서 에너지틱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다음 집은 마당 딸린 주택을 경험해보고 싶다. 마당이 있으면 좀 더 몸을 움직이는 나와 그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다들 주택이 엄청 번거롭고 관리해야 할 게 아주 많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집이 우리에게 관리의 노동 외에 어떤 것을 부여할지는 아직 모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