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같지 않은 현실의 카타르시스
와, 밖에 첫눈 내려!
아침부터 첫눈으로 들뜬 카톡방들을 주욱 내려보다 문득 우울해진 마음에 핸드폰을 다시 덮는다. 어렸을 적에는 봉숭아물을 들인 손톱이 첫눈 올 때까지 물이 빠지지 않은 채 유지된다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에 괜히 설레며 매일 손톱을 바라보곤 했었더랬지.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첫눈에 설레지 않는다 - 오히려 조금 우울해진다. 첫눈이 우울한 건, 하얗게 나리는 아름다운 그 모습은 하염없이 사랑받지만, 땅에 내려앉아 검게 변해 사라지는 모든 순간은 더러운 것이 되어 버림받기 때문이다. 나의 환희와 낭만이 짧은 시간 푸른 하늘에서 영광스레 나리다, 어느새 땅에 내려앉아 그 무엇보다 비참하게 그 끝을 맞으며 모두에게서 잊힐 것 같아서 - 그 순간을 마주하기 두려워서일까.
눈의 모습은 무엇일까. 내릴 때 한없이 밝고 하얗고 아름답기만 한 그 모습일까, 땅바닥에 버려져 한없이 검게 물들다 이내 사라져버리고 마는 그 모습일까. 왜 사람들은 매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지만, 하얗던 눈이 땅에 내려앉아 검고 추하게 변해 사라지는 그 모습은 외면하고 마는 것일까.
눈이 오면 해가 부쩍 짧아진다. 오후 다섯시만 되어도 어느새 깜깜해진 하늘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나에게서 시간과 기회를 뺏어가는 것 같아 괜히 아무 잘못 없는 하늘이 야속해진다. 나는 나를 보살피기에도 너무나 벅찬 인생인데, 다른 관계를 위하여 나 자신을 갈아 넣는 것이 이제는 지치기만 한다. 1인분의 삶에 타인이 관여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의 어깨에는 어느덧 1인분이 훌쩍 넘는 인생이 얹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회는 타인과의 관계를 기피하는 자에게 '외로운', '비참한', '용기 없는', '어딘가 열등한'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관계를 맺지 않음은 곧 사회적 불안과 자아의 미완성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버티는 삶에 대해, 버티는 관계에 대해 고민을 한다. 우리는 타인에게 한없이 아름답기만 한 하얀 눈으로 기억되고 싶기에 - 그 누구도 타인의 인생에 질척거리는 더러운 눈이 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를 맺는 것이 두려워진다. 그 관계가 깊어질수록, 나를 드러낼수록, 결국 그 끝은 더 나빠지기만 했으니. 누구든 보여주고 싶지 않은 추한 얼굴이 존재하고, 믿음을 가장한 솔직함이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칼부림이 되어 관계를 해치기도 한다. 더군다나 나에게는 내가 보살펴야만 하는 추한 자아가 있고, 굳이 나의 추한 얼굴을 타인의 인생에 얹고 싶지 않아서, 나는 그저 누군가의 기억 속에 파란 하늘에 나리는 하얀 낭만으로 남고 싶어서.
보일러를 따끈하게 틀어놓고 두 겹으로 엮인 극세사 담요에 둘러싸여 SNS 세상의 한없이 신난 사람들을 바라본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첫눈에 더 이상 설레지 않는 내가 비정상적으로만 느껴진다.
나의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다면 - 다시 말해 1인분의 삶이 이미 너무나 벅차다면 - 첫눈에 더 이상 설레지 않는 그대에게 몇 개의 영화를 소개한다. 주변의 hype(과대 선전 / 과하게 들뜸을 일컬음)을 거부하고 집에서 포근한 고독 속 오롯이 혼자 즐길 수 있도록 넷플릭스와 왓챠플레이에서 볼 수 있는 작품으로만 엄선했다.
님포매니악 Vol. 1 & 2 (Nymphomaniac Vol.1 & 2, 2013)
감독: 라스 폰 트리에
어디서? 왓챠플레이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센세이셔널한 영화를 찍는 걸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의 전작 멜랑콜리아(Melancholia, 2011)는 우울에 관한 깊은 단상을 파헤치는 작품이다.님포매니악(Nymphomaniac)은 섹스중독자라는 뜻이다. 볼륨 1과 볼륨 2 모두 '조'라는 여자의 일생을 다룬다. 그녀의 결핍, 그리고 이로 인한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섹스로서 채우고자 하지만 이로 인해 점점 더 돌이킬 수 없는 구멍 속으로 빠지고 만다. 볼륨 1에서는 어린 조의 이야기, 볼륨 2에서는 나이 든 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님포매니악은 영화를 챕터로 나누어 진행하고, 타인과의 관계와 섹스 행위를 낚시에 비유한다.
볼륨 1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조는 섹스 행위로 갈망, 결핍, 성취, 연대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하려 한다. 섹스가 본인의 권력으로 기능함을 알아차린 조는 점점 더 파멸적인 행동과 관계로 자신을 갉아먹으며 생의 원동력을 탐한다.
볼륨 2에서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 조는 안정적인 관계를 원하고, 지루한 현실과 타협하고자 한다. 허나 이미 너무 먼 길을 떠나버린 조는 참을 수 없는 현실과 죽어버린 욕망 사이 갈등한다.
"Fill all my holes."
물리적인 섹스로 감정적 갈망과 공허함을 해결하려는 조는 조용히 외친다. 나의 모든 구멍을 채워달라고.
※ BDSM 섹스에 트리거 혹은 트라우마가 있으신 분들은 영화의 몇몇 장면이 힘들 수 있습니다.
함께 보면 좋은 영화: 아메리칸 뷰티 (American Beauty, 샘 멘데스, 1999)
이 영화 역시 겪어보지 못한 새로움에 대한 갈망에 의해 전개되는 서사이다. 가족이란 형태로 엮여있는 사람들이 고고한 자아의 피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새로운 흥분과 모험을 탐하는, 그 추악함에서 비롯된 역설적인 아름다움에 관한 작품이다. 비참한 내용임에도 웃음이 피식피식 난다. 감독은 '아메리칸 뷰티'를 코미디 장르라 분류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03)
감독: 이누도 잇신
어디서? 왓챠플레이, 넷플릭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다나베 세이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이 작품은 비장애인인 츠네오와 장애를 가진 조제의 아주 평범한 연애의 일대기를 그린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그 누구도 조제를 '장애인'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개 장애인으로 설정된 인물은 작품에서 동정의 대상으로 쉽게 소비된다. 그 장애를 가진 인물에 사랑이라는 주제가 엮이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랑은 모종의 의무감에 의해서라도 영원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장애라는 이유로 인해 의무감을 띠게 되는 사랑은 동정이다. 동정은 위계를 가진 감정이다. 우리는 이 위계에 너무나 익숙한 삶을 살아와서, 장애라는 맥락이 빠지고 애정만이 어린 조제를 바라보는 츠네오의, 츠네오를 바라보는 조제의 시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나쁘지 않아.
조제는 사랑의 끝을, 다시 혼자가 되어 깊은 바닷속으로 잠기게 될 그녀의 모습을 직시한다. 그럼에도 조제는 츠네오에게 매달리거나 애원하지 않는다. 조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욕망하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사랑의 끝에 다가선 츠네오는 담백하게 조제를 떠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일본 영화 특유의 과한 감성을 싫어하는 나 같은 사람도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아주 담백한 사랑에 관한 영화이다. 당신이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꼭 혼자 보기를 바란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015)
감독: 홍상수
어디서? 왓챠플레이, 넷플릭스
"사랑해"라는 간절한 이 한마디가 온 극장을 웃음바다로 만들 수 있는 영화가 얼마나 될까.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 홍상수 감독은 이 제목에 일부러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 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얼만큼 피상적이고 우스울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함춘수(정재영)와 윤희정(김민희)은 솔직함의 권력싸움을 벌인다. 나를 욕망하는 저 남자의 술기운을 빌린 가벼운 말 한마디가 얼만큼 우스운지, 솔직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 얼마나 비겁한지, 이 작은 단어 단어가 모여 어떤 결말을 가져오는지.
이 영화는 홍상수 감독이 <북촌 방향>, <옥희의 영화>에서 선보인 반복적 진행의 형식을 가진 두 챕터로 진행된다. 첫 챕터는 영화의 제목인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두 번째 챕터는 '그때는맞고지금은틀리다'로 구성되어 있다. 두 번째 챕터의 한 끗 솔직함의 차이가 가져오는 결말의 차이는 다시 한 번 제목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사랑해, 내가 널 이만큼이나 사랑해. 우리 강원도에 가요 - 지금 당장 택시 타고 가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피상의 순간이 모여 만들어내는 무의미의 절정을 그려낸다.
함께 보면 좋은 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2016, 홍상수)
이제는 하늘로 떠난 고 김주혁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이다. 관계와 소유, 욕망과 방황에 관하여 결국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굴레를 그려내는 작품이다. 당신이 타인에 대해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란 것을 - 당신이 아는 당신은 당신자신이 아니라 당신의 것 중 일부라는 당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첫 장면과 엮이는 유기성을 발견한다면, 결국 벗어날 수 없는 당신의 것과 이것들이 이루는 관계의 굴레에 무력감을 느낄 수도 있다.
클로저 (Closer, 2004)
감독: 마이클 니콜스
어디서? 왓챠플레이, 넷플릭스
안녕, 낯선 사람.
콜럼비아 픽쳐스의 로고가 뜨는 순간부터 흘러나오는 데미안 라이스가 부른 The Blower's Daughter로 이 영화는 그 시작과 끝을 알린다.로 이 영화는 그 시작과 끝을 알린다.
이 작품은 낯선 이의 초상을 담는 안나(줄리아 로버츠)와 낯섦으로 환상을 만들어내는 스트립 댄서 앨리스(나탈리 포트만), 그리고 처음 마주한 앨리스에게 빠져버린 소설가 댄(주드 로)과 댄의 장난으로 안나를 처음 마주하게 되지만 이내 깊게 빨려 들어간 피부과 의사 래리(클리브 오웬)가 엮어 나가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고를 당한 앨리스를 마주하자마자 바로 자신의 여자라고 정의해버린 댄. 허나 그에게 그녀는 낯섦이 익숙함이 되며 또 다른 낯섦을 선사하는 안나에 설레게 된다. 댄과 관계를 맺는 안나에게 불안정함을 느껴 미지의 스트립댄서에게 모험을 감행하는 래리. 이들이 '낯선 사람'으로 맺어가는 관계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 속 스쳐 지나가지만 쉽게 외면하는 수많은 순간의 감정을 직시하고 이를 스크린에 펼쳐 보인다.
다각적으로 꼬여버린 관계에 갇혀버린 댄은 안나에게 왜 거짓을 말하지 않았는지, 래리는 앨리스에게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는지 추궁한다. 하지만 앨리스는 진실을 말했다. 그것을 진실이라 믿지 않은 건 래리와 관객일 뿐이다.
+) 래리와 앨리스가 스트립 바에서 만나 나누는 이 대사들은 Panic! At the Disco의 1집 A Fever You Can't Sweat Out의 트랙 제목들과 노래 가사로 쓰이기도 했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느껴지지도 않는 사랑은 실재할까? <클로저>는 결국 가벼운 몇 마디의 말로만 떠다니는 사랑이라는 관념 - 사랑이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타인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또 새로운 흥분을 찾아 떠도는, 정착을 갈망하는 영혼들의 항해를 그린다.
※ 물리적인 데이트 폭력에 트리거 혹은 트라우마가 있으신 분들 영화의 몇몇 장면이 힘들 수 있습니다.
함께 보면 좋은 영화: 뉴니스 (Newness, 2017, 드레이크 도리머스)
'세상의 모든 것은 거래야. 제일 슬픈 사람들은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지.'
<뉴니스>는 데이팅 앱을 통해 만나 상호 독점적 관계를 형성해나가고자 하는 마틴(니콜라스 홀트)과 가비 (라이아 코스타)의 이야기이다. '솔직함'이 관계의 해답이라고 믿었으나, 결국 이는 독이 되어 그들의 관계를 파괴한다. 나 자신도 감당할 수없는 고통에 솔직하기 위해서는 가끔은 완벽한 타인이 필요할 때가 있다. 고통을 공유한 완벽한 타인이 더 이상 낯선 타인이 되지 않을 때 - 결국에 그 타인을 모험하게 될 때 - 우리는 결국 같은 관계의 굴레에 갇히고 만다. 이 영화는 도리머스 감독의 전작 <Like Crazy>의 안톤에게 바치는 영화이다. <Like Crazy>도 반복과 권태에 지친 연인들, 타인을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는 모습에 도취된 자아 사이의 방황을 잘 그려낸 영화이니 한번 보길 바란다.
온갖 미디어에서 타인과 맺어가는 관계의 아름다움을, 그 환상을 학습시킨다. 마치 그 관계에는 엔딩크레딧이 영영 올라가지 않을 것처럼, 마치 타인을 짊어지고 사는 삶만이 유의미한 삶인 것처럼, 마치 첫눈에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그리며 설레야하는 것처럼.
1인분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오늘도 발버둥치는 당신, 오늘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말고 오롯이 혼자 고독을 즐겨보자. 첫눈에 설레지 않아도, 첫눈에 조금은 우울해져도 괜찮다. 그 깊이가 당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 나는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