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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산 Dec 30. 2018

'노승혜'를 보며 엄마를 그리다.

당신은 나를 자유로이 날 수 있게 키워내었다.

나는 골프라는 운동을 참 싫어한다.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자마자, 아빠는 나에게 "나중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운동이다" 라며 강제로 골프 강습소에 보냈다. 내가 골프를 배운다는 사실에 한껏 들떠 몇 명에게나 자랑하고 다녔는지 셀 수도 없었다. 매주 백만 원 정도를 라운딩 도는데 쏟아붓는 아빠는 엄마에게 본인의 '야망을 위한 골프' 행위에 동참을 하지 않는다며 상스러운 말을 섞은 비난을 매일같이 내질렀다.


나는 원래 구기 운동에 능해(?) 골프를 빨리 배우고 나름 치기도 잘 쳤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농구나 라크로스처럼 거칠고 동적인 운동을 좋아하고 골프처럼 비교적 정적인 운동은 정말 싫어한다. 그래서 강습소에 나가는 날들이 너무 괴로웠다. 그리고 강습소에 있던 사람들은 나를 보고 '허벅지가 탄탄하니~'를 이유로 온갖 듣기 괴로운 말들만 내뱉었고, 쉬는 시간에는 내가 마시지도 않을 믹스커피를 최고의 호의랍시고 내밀고는 했다.


한 달 정도 나갔을까, 나는 강제로라도 꽤 괜찮은 드라이브를 칠 수 있었다. 강습소에서는 주니어 선수과정을 준비할 것을 권유했고 나는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몸짓을 통해 싫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빠는 혼자 신나 본인의 친구를 불러 스크린 골프를 치자며 어느 서울 구석에 있는 스크린 골프장으로 데려갔다. 학교를 갔다가 학원을 갔고, 집으로 돌아와 스크린 골프장에 가니 밤 11시였고, 설상가상 아빠의 지인은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늦었다. 나는 환기도 되지 않는 담배연기 자욱한 스크린 골프장 방 안에 갇혀 구석에 앉아 잠에 들기 시작했고, 아빠의 지인분이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곱빼기 짜장을 시켜주었다.


나는 배달 중국음식을 먹지 않는다. 먹으면 항상 극심한 두통과 함께 속이 뒤집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먹지 않았다. 아빠는 어서 빨리 드라이브를 치라고 채를 코 앞에 들이밀었다. 나는 잠에서 깨지 못해 치지 않았다. 지옥 같은 스크린 골프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아빠는 나에게 소리만 질렀다.


"네가 골프를 친다고 해서, 내 친구까지 부르고 짜장까지 시켜주고 판을 다 깔아줬더니 뒤에서 잠을 자?"


나는 아빠의 전시용 자식이었다. 아빠는 나에게 단 한 번도 골프가 재밌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나에게 짜장을 먹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았다. 당신 친구와 함께 스크린 골프장에 가도 괜찮은지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당신의 전시용 자식으로서의 기능을 온전히 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부끄러운 자식이 됐다.


아빠의 전시 생활은 살고 있던 집이 담보로 넘어가기 직전이 되어서야 끝났다. 그게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엄마는 이혼 준비를 하며 소유 재산 목록을 확인하다가 본인이 샀던 부동산 매물이 전부 사라진 걸 확인했고, 그때부터 전시용 화목한 가족은 그 겉모습까지 산산이 조각났다.


엄마가 스무 살 때부터 과외를 8개씩 하고, 호프집 알바를 하고, 야학을 하며, 본인이 서울대 의대를 포기하며 남동생들을 대학에 보내면서도 학생운동까지 하던 시절부터 모아 온 돈으로 - 스물넷 한 번에 임용을 통과하여 포천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고서부터 눈물로 모아 온 돈으로 샀던 집이, 아빠의 '나는 이만큼 괜찮은 가족을 가진 성공한 남자야'라는 연극을 위해 가루처럼 사라졌던 것이다.


아빠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전시 생활이 엄마에 의해 강제로 끝나게 되자, 아빠는 나에게 "너 때문에 이 아파트가 넘어가게 생겼다"라는 말을 내뱉었고,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일단 죄송하다고 했다. 그리고 방에 처박혀서 한참을 울었다.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공부를 퍽 잘했고, 꽤 괜찮은 학교들을 나왔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전시용 빚 위에 걸린 그림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누구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은 억울했다. 과외는 일절 하지 않았고, 학원을 하나 다녔는데, 그 학원의 시스템이 워낙 이상해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가는 높은 반일 수록 학원비가 엄청 저렴해졌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의 반일 수록 학원비가 엄청 비쌌다. 데스크에 계시던 행정 선생님은 나에게 '공부 못하는 애들이 내는 돈으로 너네가 이 정도를 누리는 것이니 감사한 마음으로 공부하라’고 했고, 그 학원비마저도 학원에서 열리는 무슨 수학 영어 경시대회에서 2등을 해서 장학금을 받았기에 거의 내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 방구석에서 울며 내 나름대로 했던 최선을 다했는데, 왜 알아주지 않을까, 라는 말을 속으로 백만 번쯤 삼켰다.


아빠는 집안의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소리를 지르고, 벌게진 눈으로 나를 향해 상욕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밤에 집을 들어오면 내가 얼마나 무쓸모한 인간인지에 대해 늘어놓았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 부딪히는 소리, 갑자기 나는 큰 소리, 욱 하는 성질, 이 모든 것에 트라우마가 생긴 건 이 즈음부터였다. 엄마는 매번 소리를 지르는 아빠에게 대응하느라 성대결절에 걸렸고, 대구에 있는 친척들로부터 오는 모든 모욕적인 전화를 참아냈다. 엄마는 주말 아침이 되면 몰래 나를 깨워 주변의 좋은 곳들로 데려가 주었다. 엄마는 길거리에 서있는 밤꽃 나무, 사과나무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아무리 사는 게 빡빡해도, 계절마다 꽃을 피워내는 예쁜 나무들을 한 번쯤은 봐주라고.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이 됐다. 엄마 아빠는 수월한 이혼을 위해 내가 법적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합의했다. 안양외고로 편입하고 처음 받았던 모의고사 성적은 4-6-3이었다. 그때 담임은 내가 국내 대학에 진학하는 건 학교의 수치로 남을 것이라며 철저하게 외면했고, 영화를 미친 듯이 찍고 싶었던 나는 다소 긴 시간 동안 방황했다. 그러다 결국엔 내가 이 모든 상황을 탈출하는 방법은 공부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탈출을 향한 염원에서 생겨난 모든 동력을 동원해 꽤 괜찮은 입시 결과를 내놨다.


수능 성적보다 학교를 잘 못 가서 선생님들은 제발 재수나 반수를 하라고 전화를 걸어댔다. 하지만 나는 전시용 자식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었고, 내가 대학에 가야 엄마가 아빠랑 빨리 이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저는 앉아있는 데에 소질이 없어 그건 못하겠다’며 거절했다. 나는 그 대답을 남기며 학교 앞 다니던 독서실 입구의 벽돌 기둥에 머리를 한참을 박고 서서 울었다. 그냥 그래야만 했다. 엄마가 빨리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학에 가자마자 엄마는 이혼을 준비했고, 거지 같은 현행 법 탓에 10원 한 장 못 건지고 나와 백석동의 원룸으로 보따리 이사를 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엄마는 아직도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나에게 너무나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최근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에도 엄마가 '엄마 노릇을 하지 못함에 대하여' 인터뷰하는 부분이 이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엄마와 나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보라 하면, 나는 '연대’라고 대답한다. 그 이유에 대해 더 물으면 나는 잘 대답하지 못한다. 엄마와 나를 엮은 연대의식은 어떤 논리와 근거로 수립된 것이 아닌, 서로의 삶을 치열하게 살피고 감싸고 조력하는 데에서 생긴 삶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EBS 다큐프라임 본방을 못 봐서 이 부분이 얼마나 담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괴랄한 편집으로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아마 이 부분일 것으로 추측해본다.


내가 대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엄마는 "나도 참 골프가 싫었단다"라는 말을 해주었다.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반 오십을 바라보는 지금도, 엄마는 여전히 나에 대해 끊임없이 살핀다. 행여나 잘 못 먹는 음식을 먹고 탈이 나진 않았는지, 가치판단의 상황에 놓여있을 때 내가 모종의 이유로 행복하지 않을 선택을 하지는 않는지. 읽고 싶은 책은 있는지, 요즘 재밌게 본 영화는 무엇인지.


이런 죄책감에 기반한 치열한 보살핌 때문인지는 몰라도 엄마는 나에 대해 참 잘 안다. 싫어하는 음식, 잘 견디지 못하는 것, 관심 있는 분야, 사고 싶어 하는 것들 등등. 내가 먹는 것에 정말 예민한 걸 잘 알고 내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모든 것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 엄마에게, 나는 늘 마음의 빚을 안고 산다.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 때 블랙프라이데이 찬스로 산 팀버랜드 키즈를 아직도 신고 다니는 걸 어찌 알고 연말 선물로 새로운 키즈용이 아닌 성인용 팀버랜드를 사주었다.


이런 엄마는 아직도 당신의 어깨 위에 나를 향한 24년의 죄책감이라는 짐을 얹고 산다.


스카이캐슬에 등장하는 가족들 중 '노승혜+차민혁' 가족을 볼 때마다 피어오르는 이 모든 생각들을 집어넣을 수가 없다. 차민혁이 권력의 성취에만 도취되어있어 곁을 살필 줄 모르는 환경에서 서준이 여전히 겨울왕국을 좋아하는지 살필 수 있는 엄마는 참 드물기 때문이다. 아들들을 위해 스터디룸을 직접 부수고, 남편에게는 컵라면 하나 던져주며 아들들에게는 맛있는 갈비를 사줄 수 있는 배짱은 쉽게 생기지 않는 것이다. 박사학위까지 따고 교수를 하고 싶어 하는 야망을 가진 여성에게서 풍겨 나오는 우아한 지적 허영심을 연기하는 윤세아에게 나는 가끔 엄마의 모습을 본다. 담배연기 자욱한 스크린 골프장에 갇혀 먹지도 못하는 짜장면을 앞에 둔 나를 이해하고 위로해주던 엄마의 모습을, 그런 나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먹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말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는 그 위로의 용기를. 자신이 이룬 것들, 이룰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해 전시하지 않고 늘 겸손할 수 있는 그 자세를.

'엘사공주가 마법을 부렸나봐요!'

세리가 하버드 학력을 위조했다. 예고편에서 노승혜는 세리에게 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냐고 소리 지르지만, 아마 그 모든 행동의 이유와 근원을 꿰뚫고 있을 것이다. 나는 드라마에서 다른 건 바라지도 않는다. 서준, 기준, 세리가 차민혁의 전시용 자식에서 탈출해 그들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장면만 보여주었으면 한다. 한 마리의 독수리가 되고 싶어 독수리 떼와 함께 날지 않고, 날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한 마리의 파랑새로 살 수 있음을 보여준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그 회차는 꼭 엄마랑 함께 볼 것이다. 나는 엄마에게 내가 얼마큼 자유롭게 날 수 있는 파랑새인지, 당신이 날 얼마큼 잘 키워주었는지 꼭 알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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