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ognito - Still a Friend of Mine
2026년, 대중의 배달 라이더, 소위 '딸배'를 향한 막대한 혐오감으로 인해 인공지능 배달 로봇 '달배봇'이 서울 전역을 뒤덮었다. 달배봇은 4개의 조그마한 바퀴로 이동하며 반구 형태의 머리에 조악한 8비트 스크린이 부착되어 '웃음', '열심히 달려가는 중' 따위의 표정을 나타낸다. 원통형 몸통 안에 배달하는 음식이 담겨있고, 주문자가 인증코드를 입력하면 달배봇의 몸통에서 배달음식을 꺼내 먹을 수 있다. 달배봇은 개당 1톤의 무게를 자랑하며 몸통에는 달배봇 제작지원 및 후원처의 로고 - 서울시청, LG, Toss, 배달의 민족, COUPANG - 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달배봇은 "음식이 왔어요~.~", "맛있게 드세요o^^o" 등의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어 소외계층에게 인기가 많다... 고 보도자료가 나왔으나 달배봇은 소외계층 밀집 주거지역의 계단을 오르지 못해 소외계층은 실질적으로 달배봇의 실물을 마주할 수 없었다.
달배봇의 등장으로 1만 명의 라이더는 직업을 잃었다. 아현동에 사는 7년 차 프로 라이더 정수 역시 달배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겼다. 정수는 간간히 고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배달을 시킬 때 뜨는 '사람 배달' 콜을 잡아 연명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 배달'은 직접 걸어 올라가야하는 층수와 거리에 비해 배달료가 너무 적었다. 오늘도 정수는 20분 걸려 아현동 달동네 꼭대기에 있는 집에 10인분의 중식을 배달한 후 배달료 4700원을 받았다. 정수는 계단에 걸터앉아 욱신거리는 무릎을 두드리며 정산액을 확인했다. 조만간 계단을 오르는 '달배봇 프로'가 나오면 이 4700원짜리 일자리마저도 사라질 거다. 정수의 동료들 역시 오토바이 기름값만큼도 벌지 못하는 '사람 배달' 콜에 불만이 많았다. 세상은 "달배봇으로 라이더 범죄 대폭 감소!" "달배봇으로 클린 도로 만들어요!" "달배봇으로 탄소 중립 도시 실천!" 따위의 헤드라인만 배설했지 그 누구도 정수와 그의 동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계단을 걸어 내려온 정수는 어디론가 바지런히 배달을 가는 달배봇을 마주쳤다. 니까짓 게 시발. 정수는 달배봇을 힘껏 발로 찼다. "충격 감지. 충격 감지. X_x" 1톤의 무게를 자랑하는 달배봇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지만 정수의 킥을 꽤나 큰 충격으로 감지했다. 그래? 오호라... 기다려봐라. 달배야, 지렛대의 원리라고 아느냐? 정수는 충격을 받아 고개만 도리도리 돌리고 있는 달배의 눈길을 피해 버려져있는 파이프 조각을 찾았다. 정수는 파이프를 달배봇 몸통 아래에 넣고 온 무게를 실어 밀어 넘겼다. 쿵. 달배봇의 바퀴가 하나 들리기 시작하니 균형이 무너져 넘어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충격 감지... 충격 감지... 음식이 훼손되었습니다...ㅠ_ㅠ 고객센터와 대화중. 충격 감지... 충격..."
정수는 넘어간 달배봇의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어 '딸배' 단체 챗방에 올렸다.
ㅋㅋㅋㅋㅋ와 시발 실화냐?
옼ㅋㅋㅋㅋㅋ 야 달배 1톤이라는데 어케 넘김?
빡대가리 쌔끼들아 지렛대의 원리 모르냐? ㅉㅉ 공부 좀 하지 엠생 ㅉㅉ
ㅆㅂ 도발하노ㅋㅋㅋ 나도 낼 넘겨본다;;;;
누워있는 달배봇은 곧 네이트판과 이종격투기 등 온갖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궜다. 다음날엔 '넘어진 달배봇, 노동자들이 분노한다.'라는 웅장한 헤드라인과 함께 기술과 인간소외라는 거창한 담론도 오갔다. 정수는 본인의 충동적 행동이 신세대 사회정의로 해석되는 기현상을 바라보며 설레기 시작했다.
정수의 영웅적 행동은 실직한 수많은 라이더들의 심금을 울렸고, 매일 같이 각종 커뮤니티에 넘어진 달배봇 인증샷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달배봇 본사에서는 달배봇을 넘어뜨린 자들을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으나 라이더들은 CCTV 사각지대를 귀신같이 찾아내 그곳에서 '영웅적 행동'을 이행했다. 디씨 인사이드 '달배봇 갤러리'에서는 어떻게 해야 이과적으로 달배봇을 쉽고 빠르게 넘어뜨릴 수 있는지 설명하는 글이 우후죽순 올라왔고, 갤주 중 한 명은 달배봇을 쉽게 넘어뜨릴 수 있도록 파이프 끝을 개조하여 싼 값에 팔기도 했다.
서울시민은 어느덧 멀쩡히 배달을 가는 달배봇보다 중얼거리며 누워있는 달배봇을 마주하는 게 더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게 되었고, 달배봇의 모회사는 '달배봇 프로'의 개발을 중단하고 한국 법인을 빼기로 결정했다. 정수는 디씨 인사이드 달배봇 갤러리가 인정한 노동운동 열사가 되었다. 20세기 전태일, 21세기 한정수로 환생하다!
서울시는 달배봇 서비스가 중단됨과 동시에 500억 적자를 보았고, 늘 그랬듯 사람들은 '포스트 달배봇은 무엇일까' 제멋대로 추측하기 시작했다.
Nov. 17th of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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