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혜향아
오랜만에 카페에 와서 앉았다. 높은 건물의 3층. 딱 하나 남아있는 자리 앞에는 작은 창이 있었고, 나는 자리에 오자마자 앉기도 전에 창문의 레버를 돌려 작은 창을 밀었다. 솔솔. 시원한 봄바람이 들어온다.
제일 큰 사이즈에 투샷을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시침은 가지 않고 양 옆을 왔다, 갔다, 의미 없는 진자 운동만 반복하는 고장 난 괘종시계 같았다.
우선 아아가 있으니 먹어야 했다. 또 가방에는 편의점에서 산 바나나도 있었으니. 아아와 바나나는 어울릴 것이 뻔해 보였으니. 무거운 바나나 송이를 실어 메고 온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방 깊숙이 들어있는 바나나를 꺼내기 위해 다른 잡다한 것들을 거의 모두 꺼내다시피 해야 했다.
나의 숄더백은 가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용달차였다. 그는 주인에게 잔혹하게 혹사당했지만 늘 묵묵히 자기의 일을 감당해 왔다. 용달차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물건들이 있었다. 등을 돌리고 혼자 앉는 창가 자리였기에 망정이지. 신기한 물건들이 끝도 없이 나오는 마술사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꺼낸 것처럼, 내 앞의 테이블 위에는 순식간에 수많은 물건들이 올려져 있게 되었다.
바나나 송이, 안경집, 벤티용 검은색 텀블러와 톨용 스테인리스 텀블러, 진청색 트렌치 코드, 쓰다 만 휴지들, 충전선, 검은 참깨 베지밀 두유, 조금 전에 바나나와 함께 산 말레이시아 컵라면. 새 마스크를 뜯은 비닐 껍질. 영수증. 안경 닦이. 선크림.
그중에는 작은 천혜향도 있었다. 이것도 지금 이 카페에서 - 히얼 앤 나우 - 먹어치워 버려야겠군 - 지금 먹지 않으면 이제 썩어 이 행성에서 사라져 버려 영영 먹지 못할지도 몰라 - 생각했다.
테이블 위에 꺼내 놓다 보니 천혜향은 두 개였다. 세상에, 한 개도 아닌 두 개였구나. 제주도에서 자란 맛있는 천혜향 두 친구가 큰 숄더백에서 몇 날, 몇 주째 굴러다니기만 했다. 그중 한 친구는 이마가 까져 고름이 났다. 큰 숄더백, 아니 용달차 짐 칸에서 뒹구르며 먼지 같은 것이 엉겨 붙고, 이마가 까지고, 피가 나고, 고름이 나서 울고 있었다.
천혜향과 나는 많은 대화를 해야 했다. 엉겨 붙은 먼지를 뜯고, 고름을 씻어내고, 마침내 그녀의 숨통을 옥죄고 있던 얇디얇은 껍질을 까주었다. 얼마나 아프고 답답했니. 이제 숨을 쉬렴. 네 눈물 이제 내가 씻어줄게. 너의 속껍질, 너의 과즙, 너의 각질, 향기. 모두 삼켜줄게. 이제 어둠 속에서 뒹구르지 않아도 돼. 다 끝이야. 편안히 쉬렴.
내 밖의 카오스
천혜향은 너무나 맛있었다. 세상에. 잔잔한 봄바람을 맞으며 먹는 저릿저릿한 감칠맛을 품은 천혜향은 정말 한 영혼을 살 맛 나게 해 주었다. 향긋한 과즙, 진한 향기. 이것만 먹다가 죽어버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극도의 쾌락이었다.
아아 한 모금, 천혜향 한 모금 먹으며 가만히 생각했다. 무엇이 그렇게 바빴을까. 이토록 맛있는 천혜향을 두 개씩이나 잊고 무엇을 향해 그토록 야멸차게 뛰어다녔을까.
나를 홀리는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내 밖에 있었다.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공부, 소소한 돈벌이, 옳고 그름, 장바구니에 담긴 물건들. 셀 수도 없이 많은 순간들이 내 마음을 빼앗아 갔다. 모든 것들이 진하고 강렬해 감당하기 버거웠다.
비난, 야비한 농담, 눈치. 공감되지 않는 대화들, 두려움, 심리 게임, 방어적 일상, 경쟁, 열등감, 오해, 미움, 화해, 억지, 소리 지름, 강박적 기도, 거짓 웃음, 일찍 감, 늦음, 뛰어다님, 안경에 김이 낌, 질투와 협작, 불온한 생각들, 할인되었습니다, 환승되었습니다, 이번 달 요금이 미납되었습니다. 여기 전기불은 왜 켜놓는 거야. 몇 시에 일어났어? 예배는 드렸어요? 이동시에는 마스크 좀 써주세요.
탈글래시즈
흐린 봄날 늦은 오후. 가히 수년 만에 안경을 벗고 길거리를 걸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저물어가는 옅은 햇볕을 받으면서, 하염없이 그냥 걸었다. 잠잠히 재즈 같은 음악만 들으며 뚜벅뚜벅 걸었다.
안경을 벗으니 감당할 수도, 감당할 필요도 없는 불필요한 정보들이 안 보인다. 희미하고 부드럽다. 내 밖의 세계에게 정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나에게, 나의 안에, 나의 리듬에 집중되었다. 지금처럼. 세상을 딱 이 정도의 시력으로만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너도, 우리 모두 서로 이렇게, 희미하게 눈물 너머로 보아주면. 내 안의 모든 감정과 이성이 파헤쳐지지 않고, 그저 다만 누군가에게 보듬어지며 삼켜진다면.
영양은 놓치면 안 되지. 밥은 먹어야지. 아침에 일어나 꼭 바득바득 샤워를 하고 먹히지도 않는 무거운 찌개를 꾸역꾸역 먹고, 목에 걸리는 비타민을 꼴딱 삼키고 뛰어나가곤 했다. 그러지 않아도, 꼭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었는데. 세수만 하고, 안경도 벗고, 좀 가볍게, 후드 티 하나 입고, 이렇게 과일도 먹고, 글도 좀 덜 쓰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도 좀 안 사고, 가만히 천천히 밀린 책들을 읽고, 가볍게 발제물을 만들고, 가볍게 걷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살아도 됐는데.
천혜향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바나나, 그리고 가능하다면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까지. 이렇게 단순한 것들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작은 창에서 솔솔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천혜향을 한 입 베어 무는데, 눈도, 혀도, 마음도 시큼하다. 말도 안 되고 설명도 안 되는, 불가해한 눈물이 귤즙처럼 삐져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