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내가 아닌 것들로 시간이 지나간다. 써야 한다. 곧 열두 시가 다가온다. 한 문장이라도. 한 단어라도 써야 한다. 아쉬워 벌써 열두 시. 어떡해 벌써 열두 시네.
사실 어제부터 써야겠다고 생각한 글이 있었다. 어느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남성 출연자 세명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었고, 고민도 하면서 생각을 좀 글로 다듬어 남겨두고 싶었다.
현장은 압구정동에 있는 어느 건물의 지하 1층에 있는 소극장이었다. 소극장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아마 작가나 코디네이터, 엔터테인먼트 회사 직원 등이었을 것이다. 소극장 안에는 열 명 내외의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출연한 배우들이 아직 유명하지는 않은 것 같았고, 웹이나 케이블 채널 위주로 론칭하는 작품이어서 기자들이 아주 많지는 않은 것 같았다.
작품은 남자 세명이 주인공이었는데, 남자 배우들은 젊었다. 애 뗘 보일 만큼 어린 이십 대였다. 한 명 한 명 마스크도 너무 좋고 정말 매력 있었다. 미소년 같은 세명의 배우들은 작가나 코디네이터, 피디에게 항상 둘러싸여 있었다. 온라인 제작발표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여성 크리에이터들이 배우들에게 카메라를 가까이 가져가 무언가 쉼 없이 담고 있었다. 작가가 중국어나 동남아 언어나 일본어 인사말을 소리나는 대로 한국말로 적어놓은 스케치북을 넘기면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따자하오, 곤지찌와. 배우들은 즉석에서 입을 맞춰, 어여쁜 웃음을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인사했다. 이십 대 때는 남자가 저런 표정을 짓기도 하지. 예쁘고 아름다웠다. 정말 꿈 많고 가능성 많은 배우들은,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르고 흐뭇했다.
온라인 제작발표회는 우당탕탕 정신없이 끝이 났고. 이제 세 명의 배우가 라이브로 접속한 팬들과 한 시간 정도 소통을 하는 순서가 남아있었다. 배우들은 온라인 팬미팅을 하기 위해 각자 다른 공간으로 헤어졌다. 소극장 무대에는 세명중 가운데 있었던 깜찍하고 상큼하게 생긴 배우가 노트북을 보면서 라이브로 소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장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빨리 집에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분주하게 할 일을 하면서도 힐긋힐긋 배우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관심이 있었다면 차라리 여자 진행자에게 관심이 있었지 이십 대의 남자 배우들에게 관심이 있을 리는 없었다. 그렇게 무심코, 노트북 앞에서 방긋방긋 웃음 짓는 배우의 모습을 보곤 했는데, 문득 장비를 내려놓고 배우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게 되었다.
배우가 팬들과 소통하는 모습이 너무 팬시fancy하다고 느껴졌다.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고 싶어졌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나도 아직 잘 몰랐다. 어쨌든 참 흥미롭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장면이라고 느껴졌다. 그러니까 뭐랄까. 아무리 이십대지만 느끼하기도 하고, 너무 예쁜 표정으로, 너무 밝은 얘기만 하려 들었다. 방긋방긋 웃는 얼굴. 콧소리가 섞인 애교 목소리. 간질간질한 이야기들. 요즘은 그러한 덕목이 젊은 남자 배우의 필수 요건인가. 나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나의 감성에는 부대꼈다.
그들은 배우다. 이 세계에 대한 긍정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한 모습은 배우로서 적절한가. 잘 생기고 피부결이 고운 남자 배우들의 밝고 예쁘고 긍정적인 모습. 그런 것이 대한민국 라이징 맨 스타의 표준인가. 내가 유럽 배우 중에서 그런 스타일을 본 적이 있었던가. 동남아시아에서는 좀 본 것 같다. 하여튼 그런 생각을 했다(그때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금 쓰면서 생각해보게 됐다). 문화 사대주의자는 아니지만 우리 문화 세계의 현상은 그런 것 같았다.
적어도 나는 유치원을 졸업한 이후로 남자 배우든 여자 배우든, 어떤 배우에게도 그런 모습만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스토리 크리에이터든 스토리를 표현해내야 하는 배우든 그들은 무엇보다 아티스트다. 그들이 팬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밝고 예쁜 면만을 깎아서 만들어낸다면, 피에로처럼 언제나 웃기만 한다면, 더 이상 우리가 그들을 아티스트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배우든 광대든, 엔터테이너나 연예인이 될 수도 있고, 부르는 이에 따라 그렇게 불릴 수도 있겠지만, 정체성 자체가 오직 엔터테이너일 뿐인 사람을 우리가 배우나 작가라고 불러주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성인 남자 배우들에게 예쁜 이야기를 써서 건네주는 작가. 예쁘고 고운 모습을 기대하고 부추기는 여성 팬덤. 그런 메커니즘 속에서 돈을 버는 엔터테인먼트 회사. 누구의 책임일까. 누가 대표로 손바닥을 맞아야 할까.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은 자본주의다. 불현듯 오싹하다고 느낀 지점이 바로 그 지점이었다. 자본주의 웃음이란 것이 정말 있었다.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희멀건 남자들의 모습이 참 귀엽기도 했지만, 그것들이 스물이 훌쩍 넘은 성인 남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다 큰 남자가 인후부를 짓누르고, 코 안의 전두동을 찡긋 눌러서 귀여운 목소리를 내며 팬과 소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각기 다른 인격적 개성을 가진 세명의 배우가 일제히 그런 모습으로 팬들을 대한다면. 그런 정신으로 연기한다면. 세계를 온통 긍정으로 바라본다면. 인기와 돈을 예술의 목표로 삼는다면.
스마트폰으로 한눈에 보기 좋은 예쁜 카메라 프레임. 아슬아슬하게 짧은 스커트를 입은 이십 대의 여자 진행자가 높은 의자에 걸터앉아, 호방 호방 웃으면서 작가가 써준 큐시트의 질문들을 스피디하게 지워나가는 진행 분위기. 세 명의 배우들은 한 번이라도 더 단독샷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갇힌 듯 지저귀는 아기새들처럼 바삐 마이크를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좀 진지한 이야기도 하고, 거울보고 연습하지 않은 거친 표정도 좀 짓고, 고민하듯 멈칫거리기도 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도 보이는 사람은 설 자리가 없었다. 물 흐르듯 유려하게 지나가는 온라인 토크. 예쁘고 웃기고 좋은 것만을 사랑하는 사람들. 작가가 그런 풍조에 동조하고 있다면. 배우가 긍정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천박함이다. 예술성의 결핍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세계에 대한 무지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농담처럼 말하며, 나도 그들과 함께 웃지만, 나는 내 자리에서 나의 방식으로, 사람들 앞에서 고운 눈썹을 찡긋거리며 영혼을 팔아버리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검푸른 바다로 떠나고 싶다는 꿈은 대체 다 어디로 갔을까. 조련사에게 조련된 돌고래처럼 비좁은 수족관을 뱅뱅 돌고 돌면서, 사람들과 똑같은 것만을 욕망하고, 비슷한 표정을 짓고, 하루 종일 전형적인 말들을 하는 나.
나는 이제 무엇을 믿어야 하지. 무엇을 사랑해야 하지. 나의 시간은 앞으로 갈 수 있을까. 현대 기독교에 대한 몰트만의 지적처럼, 나는 언제까지, 고대 전설 속 원초의 동그란 시간 개념에 갇혀, 빙글빙글 돌면서 제의적인 시간을 반복하고 기념하며 살아야 할까.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뜨거워지고, 불온해질 수는 없을까. 이제 영영 틀려버렸나. 지금 내가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사랑하면 좋을까.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가. 흐리멍덩해진 돌고래의 슬픈 눈을 바라보면서 묻고 싶다.
비좁은 수족관 안에서 깨끗히 정제된 락스물을 첨벙거리며 재주를 넘고 있는 나의 돌고래. 지루하고 한심한 나의 돌고래. 알량한 생선 사료 통을 발길로 세차게 걷어차 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