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러뷰 스프링

모순으로 가득한 사랑의 계절

by jungsin


나는 또다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대출 권수가 한도에 찬 줄도 모르고, 한 시간 십 분이 걸리는 학교 도서관에 가서 진지하게 책들을 뽑아 들었고. 어차피 유상 수리인 줄도 모르고, 한 시간 걸리는 상가 건물의 4층 소니 에이에스 센터를 향해 타조처럼 뛰고 오리처럼 날아갔다.


1년이라는 기나긴 보증기간 중 정확히 365일째 되는 마지막 날, 셔터 클로징 20분을 남기고 에이에스 센터에 도착했다. 멀쩡하던 헤드폰 옆이 금이 가더니, 그렇게 몇 번을 쓰자 아예 부서져 버렸다. 뒹굴뒹굴 데구루루 하다가 마침 제품 보증 기간 마지막 날이 오늘인 걸 알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구매일로부터 만 1년째 되는 날이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씻고 밥을 먹고 빨래의 일부-전부를 널면 늦을 것 같아서.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을 만큼 얼마나 긴박한 순간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를 널고, 오리처럼 꽥꽥 멀리멀리 쏴니 에이에스 세너를 향해 날아갔다.


두세 달 전 어느 음산한 겨울날이었던가. 헤드폰을 머리에 쓰다가 바직 금이 갔었다. 그렇게 몇 번 쓰다가 우두둑 내 마음과 함께 부서져 내렸었다. 난 이미 충분히 속이 상했고, 에이에스 센터 공포증이 있어 몇 달간 양질의 음악 감상을 포기하고 중소기업 이어폰만 듣다가, 그렇게 내내 에이에스 센터를 치과처럼 가기 싫어하며 두려워 떨다가, 용기 내 꽥꽥 날아갔는데. 유상 수리라는 것이다. 헤드폰은 원래 다리나 허리가 아니라 머리에 쓰는 것이라서 머리에 쓰다가 부서졌을 뿐인데. 어쨌든 유상 수리라는 것이다.


쏴니 헤드폰이라면 나와 달리 강할 줄 알았는데, 헤드폰도 왜 이렇게 내 마음처럼 약하냐고 약간의 소심한 저항과 앙탈을 부리다가. 나는 착하니까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수백 년 만에 다시 도서관을 찾아 4층에서 <쇼핑이 죄가 될 때>와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과, <죄의식: 일말의 양심>이라는, 무의식이 지시하는 오묘하고 신비로운 알고리즘의 책 세 권을 집어 들어 1층 대출 데스크 앞에 섰는데. 아. 수료생은 너무나 수려하여 다섯 권만 대출이 된다는 것이다. 이미 다섯 권의 책은 몇 주 전 빌려 마이 데스크 위에서 다른 책들과 어깨가 낑긴 채 한 번도 펼쳐지지 못하고 나와 대치중이었다.


그리고 배가 고파 그 옛날 맥도널의 필레 버거를 잠시 떠올려 보았지만 꾸역꾸역 참고. 다음 스케줄을 생각하며 753 버스를 향해 달려가 올라타면서, 부드러운 카드 키스를 했는데. 대체 왜 2400원이라는 옛날 택시 기본요금에 해당하는 숫자가 찍히는지. 이제 버스가 출발하면 말이 서서히 달리며 요금이 올라가는 건가. 시장이 바뀌더니 버스 요금 체계도 바뀌었나. 난 분명히 이전 버스에서 내리면서 굿바이 키스를 했는데. 헤드폰이어서 헤드에 썼는데. 인생은 이토록 모순으로 가득해 위트가 없으면 살 수가 없지.


그렇게 하루는 저물어가고. 나의 영혼이 녹아든 스마트폰의 생명도 얼마 안 남았는데, 바야흐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의자에서 잠시 쉬려는데 전원 소켓이 옆에 보였다. 집까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만큼만 충전하고 가자. 그런데 충전선이 없다. 헛웃음이 나온다. 난 또 그렇게, 가방의 바깥 주머니 자크가 열린 줄도 모르고. 어디로 떠나간 거니. 내게는 하나뿐인 사과폰 정품 충전 라인아. 먼 옛날 그 소녀들처럼 모두 모두 떠나가려 하는 거니.


동네에 왔다. 추적추적 제법 굵은 비가 온다. 당연히 우산이 없다. 찬 봄비를 맞으며. 소중한 전자책 리더기를 검은 재킷 안에 오리알처럼 품고. 하루의 우여곡절을 조커와 같은 쓴웃음으로 승화시키며, 이쑤시개만 없지 거의 구십 년대 홍콩영화 주인공처럼 우수에 차 걷는데.


“이거 쓰고 가요.” 저 멀리서 나를 지켜보시던 편의점 사장님께서 투명한 우산을 내미신다. 사실 이미 홍콩배우처럼 콘셉트를 잡고 가고 있었기에 그렇게 우산이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사장님의 마음이니까. 온정을 수용하는 것도 세상 사는 예의니까. 아 하하 고맙습니다. 나중에 돌려드릴게요. “그래. 여기 앞에 아무 데나 던져 놔.” 네 고맙습니다.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구나. 사람의 정이 살아있구나.


집에 올 무렵 우산이 혼자 갑자기 살이 꺾어지고 자결을 한다. 나는 손에 고이 들고 썼는데. 우산이 우산이어서 우산으로 썼는데, 순식간에 혼자 트랜스포머가 되어 자동차로 변신한다. 집에 들어와 거의 외과의사처럼 심폐소생술을 하며 골몰히 집중해 고쳐보려 했지만.


사장님 죄송합니다. 저는 우산이어서 우산으로써만 썼거든요. 마치 헤드폰을 헤드에 쓰는 것처럼요. 절대 제가 엄브렐러를 앰뷸런스로 쓰지 않았어요, 전 정말. 버스도 분명히 굿바이 키스 꾹 했고요. 생명선과 같은 충전기 라인은 또 어떻게 된 거예요 사장님. 그러게 제가 마음으로 신호 보냈었잖아요. 우산 굳이 그렇게 필요 없다고. 눈 마주쳤을 때 돌고래 초음파 사인 보냈잖아요 사장님. 3분 만에 그렇게 부서지는 게 우산이에요. 이게 불낙이야. 도대체 다들 저한테 왜들 그러는 거예요.


절망과 희망, 모순으로 뒤섞인 푸른 별의 봄. 가장 간절히 필요하다고 느끼는 건 위트와 여유다. 살아있는 호흡, 나의 호흡과 리듬이다. 그렇게 나로서 살 수 있다면 나로서 사랑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력과 마찰을 일으키며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있을 수 있어 감사하다. 모든 순간을 사랑과 위트로 와락 끌어안아 본다. 사랑해요 사장님. 사랑해요 쏘니. 알러뷰 라이브러리. 계속 정열의 키스해요 세울 버스.